배달의 민족 창업자 김봉진 의장과 아내 설보미 씨는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KOREAN LIFE

흙수저 창업자
한국의 배달 앱 1위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배달의 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의장이 창업 13년만에 배민 의장직을 사임하고 회사를 떠난다. 공고 출신의 흙수저 창업 신화, 스타트업의 전설로 불리는 그는 한국에 배달의 시대를 연 주역이다.
김봉진 의장은 1976년 전라남도 완도의 작은 섬 소안도의 부속 섬인 구도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가족이 광주로 이사해서 살다가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예술고등학교 대신 수도공고 전자과에 진학해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씩 납땜을 했다. 그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의 방에서 잠을 잘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대표적인 흙수저였다.
화가를 꿈꾸던 그에게 공고에서 배우는 기술과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친구들과 놀기만 하는 그를 보다 못한 부모님이 어렵게 학비를 마련해 고등학교 3학년 때 디자인 학원에 보내주었다. 내신 16등급 중에 거의 최하위인 14등급을 받은 그는 지원한 거의 모든 대학에서 떨어지고, 그나마 실기 비중이 높은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실내디자인학과에 간신히 합격했다. 대학 졸업 후 군대에 다녀온 그는 2002년 디자인 그룹 이모션에서 웹 디자이너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 설보미 씨를 만나 5년간 연애 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2003년에 네오위즈 웹 디자이너로 이직해 2005년까지 일했다. 그런데 대학 시절 다큐멘터리에서 본 ‘이케아’라는 브랜드를 동경해 가구 디자이너를 꿈꾸던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네오위즈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가구 디자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특기와 전공을 살려 가구점을 창업했지만 부도가 나면서 2억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아내 설보미 씨는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퇴사한 후 육아 공백이 길어지자 남편이 창업한 가구점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지만, 가구점 사업이 망하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김봉진 의장은 자신이 사업에 망한 이유가 작가주의에 빠져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임을 깨닫고, 이후 작품 대신 상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경영하는 디자이너’라는 모토를 갖게 되었다.

고마운 아내
2008년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월급을 많이 주는 네이버에 웹 디자이너로 재취업했다. 사업은 실패했지만 디자이너로 실력을 인정받아 재취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낮에는 네이버에서, 밤에는 웹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며 투잡을 뛰었다. 그런데 동료들이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우리 아이도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며칠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 이렇게 말했다.
“아이에게 아무리 투자해도 아이가 어리면 그 투자를 알 수 없대요. 그냥 돈만 많이 드는 거죠. 차라리 그 돈을 당신에게 투자해서 나중에 아이가 커서 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 무엇이든 지원해줄 수 있는 남편을 만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아내가 아이 대신 김봉진 의장에게 투자하기로 결정한 후, 매달 약 30만원 정도의 책값은 물론, 대학원에도 가라고 지지해주었다. 그리고 첫 사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김봉진 의장이 다시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그를 전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김봉진 의장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자신이 발간한 책 <책 잘 읽는 방법>에서 ‘해가 지날수록 더욱 좋아지고 존경하게 되는 보미씨’라고 표현했다.

배달의 민족 창업
대학원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IT 관련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IT 업체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던 셋째 형 김광수 씨에게 사업을 제안했는데, 김광수 씨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우아한 형제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봉진 의장은 셋째 형과 예전 직장 동료, 학창 시절 친구 등 5명을 모아 스마트폰 앱 기반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며 급변하는 시기였다. 여전히 첫 사업 실패 후 남은 빚이 있던 김봉진 의장은 직장을 다니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공동창업자 5명은 낮에는 각자 직장에 다니며 일을 하고,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맡은 일을 하고 주말에는 카페에서 만나 프로젝트를 진척시켰다.
그런데 처갓집에 갔을 때, 비싸고 예쁜 냉장고에 치킨집, 중국집, 피자집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이걸 없애는 비즈니스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음식 주문 앱’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처갓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음식점 전단지를 보고 배달의 민족 창업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김봉진 의장과 공동창업자들은 배달의 민족 초창기 버전인 음식점 전단지 앱을 개발하여 2010년 ‘배달의 민족’ 앱을 출시하였다. 앱을 만들기 위해 김봉진 의장은 새벽마다 아파트를 돌며 전단지를 주우러 다녔고,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

창업 아이디어보다 실행력
배달의 민족이 출시되기 전 이미 ‘배달통’, ‘배달 114’ 등 경쟁자들이 먼저 나와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배달의 민족은 출시하자마자 주요 앱 스토어에서 1위에 올랐다. 김봉진 의장 특유의 B급 감성 디자인과 발로 뛰면서 음식점 데이터를 열심히 모은 덕분이었다. 배달의 민족 앱의 가능성을 확인한 김봉진 의장은 2011년에 우아한 형제들 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알토스벤처스와 6개월간의 협의 끝에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명문대 출신 스타트업이 즐비한 상황에서, 공고, 전문대, 웹 디자이너 출신인 그가 수백억의 투자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알토스벤처스의 한 킴 대표는 김봉진 의장의 실행력을 높이 샀다고 말한다.
“김봉진 대표는 무엇보다 실행력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실 창업이라는 게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건 결국 실행력이거든요.”

고객 중심의 마케팅
배민은 10년만에 3조원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그 성장 비결은 크게 ‘배민다움’의 브랜딩과 ‘고객 중심’의 마케팅으로 귀결된다.
사업 초기 김봉진 의장은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서비스는 실패한 것’이라는 철학을 갖고 마케팅의 타겟을 계속 좁혀 나갔다. 예를 들어 샴푸 시장에 들어온 후발 주자가 1등을 하기는 어렵다. 1등을 하려면 타겟을 좁혀야 한다. 비듬 샴푸 시장으로, 10대 후반~20대 중반으로, 고등학생으로. 그래도 1등을 하기 어려우면 서울지역 2학년 남자 고등학생 중 가계소득 상위 20%이상으로 좁혀가는 식이다. 그래야 조직에 자신감을 주고 확실한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배달음식 주문을 누가 하나 살펴보니 회사에서는 막내, 친구들 사이에선 가장 만만한 친구가 담당했다. 그래서 김봉진 의장은 첫 타킷을 20대, 홍대 문화에 익숙한, 성격이 친근하고 만만한 가상의 인물을 정했다. 그들에게 먹히는 것이 바로 B급 감성이었다. 그는 이를 배민 신춘문예, 배민 치믈리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성 있게 보여주며 10년간 공들여 브랜딩을 했다.

B급 감성 마케팅으로 소비자들을 풋~ 하고 웃게 하는 배민 광고 ©우아한 형제들

배민은 배달을 하지 않는 유명 맛집 음식을 배달해주는 ‘배민라이더스’, 배달 용품 및 식자재를 유통하는 ‘배민상회’, 반찬 및 가정식 배달 서비스 ‘배민찬’ 등으로 사업을 계속 확장하며 배달 앱 1위를 고수했다. 그러다 지난 2021년 글로벌 시장 공략이라는 기로에서 김봉진 의장은 배민을 독일 기업인 딜리버리히어로(DH)에 57억 유로(약 7조 6800억원)에 매각하고, 우아DH아시아 의장으로 취임해 아시아 11개국 사업을 이끌었다. 그리고 지난 7월, 배민 창업 13년만에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의장직을 내려놓고 배민을 떠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는 배민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자기다움’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떠났다. 브랜드도 개인도 자기다울 때 가장 행복하고 빛난다. 그리고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는 창업자가 떠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정경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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