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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DUKE Korea Studies Center 설립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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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 캐롤라이나의 최고 명문이자 미국 동남부 지역의 최고 명문인 DUKE 대학교에 한국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KOREAN LIFE는 한국학과가 생긴 역사에 대해 듣고 더 발전적인 아이디어를 나누기 위해 DUKE PASS(Program in Asian Security Studies)의 디렉터를 맡고 있는 Emerson S. Niou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되었으며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 정리하여 싣는다.

먼저, Emerson S. Niou 교수는 대만 출신의 정치학 교수로서 텍사스 오스틴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그 학교에 유난히 한국 유학생들이 많아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문정인 교수와 정동영 의원 등 한국의 여러 정치, 경제계 인물들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현재 Niou 교수는 PASS 프로그램 디렉터로서 매년 100명 이상의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국에서 온 방문학자들도 35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들이 Duke에 와서 머무는 동안 바쁜 일상 업무로부터 벗어나 아이들 등하교를 시켜주며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아내와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가족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기쁘다고 했다.

PASS 프로그램에는 ‘코리아 포럼(Korea Forum)’이 2002년에 설립되어 법륜스님 등을 초청하여 오픈 포럼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현재는 별다른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Duke에 한국학과가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Niou 교수에 따르면, Duke 대학교의 최초의 유학생이 대만의 초대 총통인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개석의 맏아들 장진구를 기념해 설립된 ‘장진구재단(Chiang Ching-kuo Foundation)’에서 중국에 대한 연구와 학술교류 프로그램 활성화를 위해 해외 대학에 기금을 지원하는데, Duke 대학에 60년간 해마다 6명의 교수를 채용할 수 있는 지원금을 주면서 1997년에 3명의 한국학과 교수를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Duke에는 현재 매 학기 2과목의 한국학 관련 과목이 개설되어 학생들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고, 최근에는 한국 영화감독 초청행사 등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고 한다.

Niou 교수를 통해 새롭게 듣게 된 내용이 있었는데, 먼저 그가 한국학과 정교수 한 명을 더 채용하기 위해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n Foundation)에 지원금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Duke에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관심을 한국 정부가 보여주지 않아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그 이후에 이 지역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어 코스를 열도록 $7,000을 모아서 보내 준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회성 지원금은 한 학기 한국어 프로그램을 하고 나면 끝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으며, 장기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교수 한 명을 10년 정도 채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서 Niou 교수는 한국학과 외에는 현재 한국인 교수가 없는 실정이고, 한국학과에서 한국의 정치, 경제, 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가르칠 교수들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한국학과가 더 확대되어야 하고, 교수들을 장기적으로 채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불어 Duke에는 각 학과에서 일정 금액의 지원금을 모으면 같은 금액의 기금을 지원해 주는 매칭(matching)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만약 가능하다면 한국의 기업들과 정부 기관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Duke의 매칭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Korea Studies Center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거라는 제안을 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Duke 대학 내부에서는 한국학과의 확장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지만, Korean Studies Center가 생기면 유학생, 대학원생, 방문학자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학교에서도 당연히 교수를 더 채용하는 등 학국학과 확장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동남부의 최고 명문인 Duke에 KOREA STUDIES CENTER가 설립된다면 이는 이 지역 한인사회는 물론, 미 전역의 한인사회와 한국에 있는 국민들에게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주며, 나아가 전 세계 한국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디딤돌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우리 캐롤라이나 지역 한인사회로부터 시작해 이 지역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과 함께 KOREA STUDIES CENTER 설립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생각되었다.

[탐방] 옛 대한제국 주미공사관 113년만에 다시 태극기 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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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촬영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왼쪽)과 복원된 현재의 모습(오른쪽) ©해외문화홍보원

 

워싱턴 DC에 가면 꼭 들러 봐야 할 곳이 하나 더 생겼다. 지난 5월 22일에 개관한 옛 대한제국의 주미공사관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대한제국 주미공사관 개관식에 참석한다고 하여 KOREAN LIFE 취재팀이 직접 워싱턴에 다녀왔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양 국가에 설치한 외교 공관이었다. 원래 이 건물은 미국 남북전쟁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세스 펠프스(Seth L. Phelps)의 저택으로 지어졌다. 1882년에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후 고종은 박정양을 최초의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해 워싱턴으로 보내 공사관을 매입하게 했다. 이는 조선 후기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더 큰 외교적 지평을 열고자 했던 고종의 자주외교 정신을 담은 결정이었다.

이 건물은 백악관에서 1.5km 떨어진 로건 서클에 위치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고종은 당시 궁궐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금 2만 5천 달러를 주고 이 건물을 사들여 1889년 2월부터 공사관으로 사용하였다.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을 비롯해, 초대 서기관 월남 이상재 선생 등이 이곳을 거쳐가며 대미 외교활동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공사관의 역할도 멈추게 되었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일제가 이 건물을 단돈 5달러에 강제매입해 10달러에 미국인에게 팔아 넘기고 말았다. 이후 공사관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아프리카계 군인들의 휴양시설과 화물운수노조 사무실, 개인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부터 교민사회와 역사학자, 언론인들의 노력으로 이 건물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고, 이민 100주년을 맞아 2003년에 재미동포사회에서 한 차례 공사관 매입 움직임이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어서 문화재청에서 나서 정부차원에서 건물의 전(前) 소유주인 젠킨스 부부와의 협상을 통해 2012년 10월 350만 달러(39억 5000만원)에 매입하였다. 이로써 공사관을 빼앗긴 지 102년 만에 다시 소유권을 되찾아오게 된 것이다. 젠키스 부부는 본인들이 역사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으며, 이 건물의 전 소유주가 태극기가 걸린 내부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어 이 건물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매우 의미가 있는 건물이라는 점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국내외 각종 문헌과 사진자료 등을 바탕으로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난 3월 12일 최종 준공하였다.

공사관을 둘러보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왼쪽, ©연합뉴스)와 방명록(오른쪽)

 

공사관 개관식 날짜는 1882년 5월 22일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날짜에 맞춰졌다. 이날 공사관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체결한 첫 조약으로, 나라의 위세가 기울 때 외교를 통해 힘을 세우려고 없던 살림에 큰 일을 한 것이며, 이런 이야기들이 제대로 기록으로 남아 알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관식에서는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후 113년 만에 다시 태극기를 게양하는 행사가 특별히 마련되었다. 문 대통령 부부는 박정양 초대공사 등 공관원의 후손들과 함께 공사관 시설을 둘러보고 “자주외교와 한미우호의 상징,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라고 방명록을 남겼다.

이날 공사관 밖에서는 폭우 속에도 문재인 대통령을 환영하는 교민들이 현수막을 들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경호 때문에 문 대통령과 직접 악수를 나눌 수는 없어 아쉬워했다.

폭우 속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환영하는 교민들(왼쪽, ©청와대)과 현수막(오른쪽)

 

113년만에 다시 개관한 공사관 건물은 현존하는 대한제국 외교 공관을 통틀어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한 단독건물이며, 또한 미국 워싱턴 D.C. 안에 있는 19세기 외교 공관 30여개 가운데 내외부의 원형이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로 확인되어 미국의 외교사적 측면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앞으로 공사관은 대한민국 역사와 한미관계사를 알리는 역사박물관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건물의 주차장으로 쓰이던 공간에는 불로문(不老門)과 박석(薄石)을 갖춘 작은 한국 정원을 마련되었고, 1층에는 접견실인 객당(客堂)과 사교장 기능을 하는 식당(食堂), 중앙 홀이 시카고 만국박람회가 열린 1893년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업무공간인 2층에서는 공사 집무실, 서재, 침실, 욕실이 있고, 3층은 공사관 설치와 변천 과정, 주재원 일상생활 등을 보여주는 자료와 유물로 꾸며져 있다. 2층 화장실에 가면 그 당시 수세식 화장실을 직접 사용해 볼 수도 있다.

공사관 개관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관람료는 없다. 한국어와 영어 해설사가 있으며, 예약은 공사관 누리집(www.oldkoreanlegation.org)에서 할 수 있다. 자녀들과 함께 관람을 가실 분들은 KBS 광복 70년 특집 ‘되살아난 역사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보고 가시기를 권한다.

KOREAN LIFE 신문 창간 개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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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일, KOREAN LIFE 신문 창간 개업식이 신문사 사옥에서 열렸다. 이날 약 50여 분의 내빈과 신문 전문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준길 대표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두 시간에 걸쳐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사회는 캐롤라이나 열린방송 진행자 김기정님이 맡아 진행해 주었고, 임태주 랄리 한인회장, 유충현 전 랄리 한인회장, 황옥란 랄리 상공회장, 그리고 조재언 RTP지역 한인교회협의회장이자 한마음RTP교회 담임목사, 이우일 아가페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님 등이 KOREAN LIFE 신문이 한인사회에 꼭 필요한 신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축사와 축도를 해 주셨다. 이어서 KOREAN LIFE 신문의 전문필자 20여 분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창간식에 참석한 전문필자분들에게 이준길 대표가 위촉장을 전달하였다.

다음으로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힘입어 북한이 서서히 개방화 정책을 펼 것에 대비한 교포들의 투자 기회에 대한 간담회가 이준길 대표의 발제로 진행되었다. 마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 관광산업에 대한 투자를 공개적으로 요청한 상황이어서 북한은 앞으로 전 세계 투자자들과 종교인들에게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1부 행사를 마무리하며 흥겨운 사물놀이와 멋진 북 공연이 이어졌는데, 한마음RTP교회 조재언 목사님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이런 외부 행사에 참석한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풍물 공연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며 북소리에 가슴에 뛴다고 소감을 전했다.

2부에서는 정성껏 준비한 풍성한 만찬을 함께 나누며 참석자들의 자유로운 축사와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특히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한 풍물 앵콜공연이 이어지면서 즐거운 잔치 분위기가 절정에 달하였다. 평소에 풍물공연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어린이 관객들이 풍물 가락을 몸으로 느끼며 공연에 빠져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조재언 목사님의 축도로 모든 행사를 마치고 이준길 대표가 내빈들에게 ‘KOREAN LIFE’ 창간기념품을 전달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내빈들을 환송했다.

행사를 위해 뒤에서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모든 분들의 기대와 격려에 부응하는 KOREAN LIFE 신문으로, 한인들에게 꼭 필요하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신문이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바이다.

랄리한인침례교회 선교바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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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4일(토) 랄리한인침례교회(담임목사 최동갑)에서 해외 선교사업 지원을 위한 선교바자회가 열렸다. 로비에는 교회 성도들이 각 목장별로 정성껏 준비한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졌고, 체육관과 현관에서는 가구 등 생활용품 야드 세일이 열렸으며, 마당에서는 세차 서비스, 사무실에서는 이미용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지역 한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방문하여 평소에 먹기 힘든 다양한 한국 음식을 맛보며 풍성한 잔치를 즐겼다.

이 교회의 행정 및 목장 사역을 담당하는 박원철 목사에 따르면 선교바자회는 매년 한 번씩 열리는 정기적인 행사로, 바자회를 통해 마련된 수익금은 전액 해외 선교지로 보내져 그곳의 필요를 섬기는 데에 사용된다고 한다.

[독자마당] 가로수 – 김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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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김영국

 

그날의 눈물은

소리 없는 항변이었다.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모조리 닫고

오직 너의 소리만을 들으려고

나는 온몸을 곤두세웠다.

꽃잎이 떨어져 퇴색한 하늘은

온통 눈물 바다.

하늘은 가끔

은빛 한 점 구름을 토해낸 채

그렇게 가쁜 숨을 쉰다.

 

밤새워 촛불을 켜고

기다려도

여전히 파도가 이는 바다

떠나간 유람선이 남긴 흔적은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 물방울뿐

바람이 불수록 높이 날고 싶은 기러기는

긴 날개를 펴고 하늘을 움킨다.

끼룩끼룩 물새가 난다.

끼룩끼룩 날 가두어 놓지 마세요

녹이 슨 가슴을 드러낸 채

삶을 저울 질 하고픈

그럴수록 더욱 속이 비워

아득히 먼 곳으로

옮겨 갈 수 없는 지금

목소리는 점점 야위어 간다.

 

▶ 작가의 말

어느 날인가 새벽에 일을 마치고 오면서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예전에 소록도라는 섬에서 한센병 노인들을 간병하는 일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숙소와 가까운 해변으로 자주 산책을 가곤 했는데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를 거닐었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가끔씩 삶의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무엇인가에 몰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미국에 이민와 사는 삶이 때로는 여유를 잃고 되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자신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며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김영국

뉴욕에 거주, 홈케어 일을 하고 있으며 온라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독자마당] 마음에 담은 사진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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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진 하나가 있다. 내가 미국으로 오던 날, 친정 부모님은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공원산책을 하셨다 한다. 찬바람이 느껴지는 늦가을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은 내 부모님, 그 텅빈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엄마가 그 사진을 보여 주었다. 둘째를 낳고 누워 있던 때라 아버지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던 터였다. 하필 그 사진이 지인의 따님 결혼식에서 생각날 게 뭐람. 아마도 그날 본 작은 꼬마 아가씨 때문인 것 같다.

두 살쯤 되었을까.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객으로 온 그 꼬마 아가씨는 자기와 똑 닮은 아빠 품에 안겨 디저트 테이블로 왔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이었고, 그 모습이 앙증맞아 저절로 시선이 갔다. 간식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어느 새 합류한 할아버지와 아빠가 양쪽에서 아이를 연신 쓰다듬고 있었다. 이내 아이 엄마와 할머니까지 합류해 아이를 둘러싸고 안았다 내려 놓았다를 반복했다. 혹시나 다칠세라 안절부절하며, 아이의 예쁜 모습을 다 담아 두려는 듯 모두가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도 나를 저리 키우셨을 테지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표정관리가 어려워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마음을 가다듬자 주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걸어온 길과 살아갈 길은 저마다 다르지만 어느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남과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고 오답이 되지도, 내가 가는 길이라고 정답이 되지도 않는다. 잘못된 길로 접어든다면 스스로 그만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길’의 어원은 ‘길들이다’라 한다. 처음 가보는 낯선 길, 내가 길을 들여 가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연습이 없는 인생길,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스레 길들이고 나아가야 할 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오늘 결혼식은 야외에서 치러졌는데 시간 전까지 비가 오락가락해서 누구 할 것 없이 안타까워 했다. 비가 개고 해가 나오기만을 한 마음으로 기원했을 것이다. 결혼식 직전 신부 대기실에 갔더니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기적처럼 작은 바람들이 모여 화창한 날이 되었다. 오늘 신랑과 신부가 함께 내딛는 길, 항상 맑은 날은 아닐 테지만 진심으로 믿어주고 빌어주는 이들로 인해 외롭지 않은 길일 것이다. 어떤 길을 걷고 있든 모두들 마음만은 늘 맑고 화창한 날들이기를…….

 

김혜정

캘리포니아에 거주.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시와 수필을 공부하고 있다.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고 먹기는 더 좋아한다. 마라톤, 요가, 등산 등의 취미 갖고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람을 찾는 삶을 열망하며 살고 있다.

[인터뷰] 16살 정상급 피아니스트 네이든 리, 트라이앵글 오케스트라와 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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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4살이던 2016년 영 콘서트 아티스트 인터내셔널 오디션에서 1등을 하고, 이어 14개의 콩쿨을 휩쓸었으며, 15살에 이미 성숙한 음악적 해석을 보여주며 평단의 찬사를 받은 피아니스트 네이든 리(Nathan Lee, 이홍원)가 지난 3월 26일, 노스 캐롤라이나 더램에서 트라이앵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가졌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세계적인 연주자의 반열에 오른 귀한 손님을 만나기 위해 네이든과 어머니가 머물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인터뷰를 나누었다. 사실 인터뷰를 가기 전 네이든의 연주 영상을 찾아보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몸집이 작은 초등학생 같은 연주자가 마치 피아노와 하나가 되어 피아노와 대화를 하는 듯 완전한 몰입 상태에서 신들린 연주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정말 꼭 한번은 보시도록 추천하고 싶은 영상이었다. 인터뷰는 어머니와 Nathan이 함께 진행하였고, 먼저 어머니께 질문을 드렸다.

▶ 어머니, 네이든이 6살에 피아노를 시작해서 9살에 데뷔를 했다고 하던데, 피아노를 시작하게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저랑 애들 아빠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애들이 세 살 정도 됐을 때부터 콘서트에 자주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지루해 하지 않고 좋아하더라고요. 그러다가 6살 때 어떤 피아니스트 공연을 보고 자기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한 4~5개월을 졸랐어요.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8살 때 피아노를 그만 두고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첼로를 배웠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가 첼로 선생님한테 자기는 첼로가 안 맞는 것 같다고 다시 피아노를 하고 싶으니까 피아노 선생님을 좀 소개해 달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그때 만난 선생님하고 지금까지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 아이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걸 언제 알게 되셨나요?

특별하다기보다는 그냥 감수성이 좀 남다르다는 느낌을 가끔 받았어요. 예를 들어, 킨더 뮤지컬 프로그램에서 전통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단조 음악을 듣더니 “엄마, 나는 이 음악이 슬퍼서 싫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6살 때 피아노 선생님이 Nathan이 보통 아이들과 좀 다르다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어요. 그리고 피아노 교재를 새로 시작하면 막 틀리면서도 혼자 2시간씩 연습해서 책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더라고요.

▶ 피아노 레슨은 얼마나 자주 받나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사샤 선생님하고 공부하면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받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연주 여행을 많이 하게 되니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거 같아요.

▶ 그럼 나머지 시간에 연습은 어떻게 하나요?

주로 혼자 연습해요. 아이가 음악에 대해서는 자기 고집이 좀 있는데, 선생님이 듣고 이 부분은 이렇게 연주하라고 하면 선생님 앞에서는 그렇게 하고 무대에 가서는 자기 마음대로 연주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선생님한테는 그렇게 느껴지시나 보지. 그런데 나한테는 이렇게 느껴지니까 이렇게 연주하는 거야.” 그래요. 아이의 성향인 것 같아요. 사실 영 콘서트 아티스트 오디션도 저희나 선생님이나 다 말렸어요. 14살이면 아직 너무 어리니까 내년에나 한번 해보자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비행기표를 안 끊었어요. 가서 열흘은 있어야 하는데 교통비며 호텔비도 만만치 않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끝까지 포기를 안 하고 방에서 혼자 계속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는 거 알지만 해보고 싶어 하니까 할 수 없이 가면서도 실망 많이 할까봐 저는 그게 더 걱정이었어요.

▶ 그런 큰 대회나 공연 전에 떨지 않나요?

아이가 어려서 그런지 그런 부담은 안 느끼고 오히려 저보다 더 대범해요. “엄마, 연주자 어떻게 맨날 틀리지 않고 연주해? 그냥 내가 연습할 만큼 했으면 그 다음엔 내 손을 떠난 거야.”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저는 아이가 무대에 올라가면 제가 더 긴장돼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 네이든에게 물어 볼게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살면서 좋은 점, 안 좋은 점은 뭔가요?

좋은 점은 여행을 많이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안 좋은 점은 피곤해요. 공부도 하고, 연습도 하고, 연주 여행도 해야 되니까요.

▶ 자신에게 이런 특별한 재능이 주어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음악을 좋아할 뿐이에요. 그것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쁘고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 음악적으로 가장 영향을 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사샤 선생님, 그리고 프랑스 연주자 장 이브(Jean Yves) 선생님이에요. 장 이브 선생님은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따뜻한 분이에요. 공연이 있을 때 전화해서 안부도 묻고 격려도 해주세요.

▶ 연주자로서 자신의 절정기가 언제쯤일 거라고 생각하나요?

한 70살~80살 정도일 것 같아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저도 장 이브 선생님처럼 젊은 연주자들 가르치며 그렇게 살고 싶어요.

▶ 한국계 아티스트로서 한국인의 위상과 자부심을 높여주고 있는데, 한국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좋아서 하는 건데, 관심 가져 주시고, 지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셔서 감사해요.

▶ 마지막으로 어머니도 한 말씀 해 주시겠어요?

클래식 음악은 아직도 서양 문화이고, 콘서트에 가보면 대부분 나이 많은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세요. 그리고 어린 학생들 대상 콩쿨은 대부분 아시아 어린이들이 우승을 하는 데, 30대 이상 중견 연주자로 넘어가면 거의가 또 서양 사람들만 남아 있어요. 클래식 음악의 저변이 아직 넓지 않아서 아시아의 재능 있는 학생들이 큰 연주자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콘서트를 보러 와 주시는 한 분 한 분의 관심이 가장 큰 응원이고 격려가 되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는 네이든의 공연을 보러 갔다. 연주는 더할 수 없이 멋졌고, 끝없는 기립박수와 앵콜 공연이 이어졌다. 어리고 앳되어 보이는 한국 소년이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해주는 것이 더더욱 감동적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부터 사람들은 흥분 속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네이든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멀리 서부 워싱턴 주에 사는 네이든이 동부의 워싱턴 DC로 날아와 공연을 하고 노스 캐롤라이나 더램, 보스턴, 뉴욕 공연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연습을 하기 싫을 때는 동생과 놀고, 정치 뉴스를 즐겨 읽으며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목소리에 동참하고 싶다는 평범한 10학년 소년이 훌륭한 연주자로 잘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멀리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QR코드 앱을 다운받아 아래의 QR 코드를 스캔하시면 네이든의 놀라운 연주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삶이 있는 시] 바람 부는 날 저 잎새들은 – 임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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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저 잎새들은

임문혁

 

바람 부는 날

저 가지 위 잎새들은

얼마나 즐거운지

함께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는

저 잎새들은

서로 어깨를 툭툭 치며

손을 흔들며 발을 구르며

몸이 뒤집어지며, 때론 숨이 멎을 듯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고 웃고 또 웃는

저 잎새들은

 

바람 부는 날

저 가지 위 나무 이파리들은

또 얼마나 슬픈지

일렁이는 파도처럼 어깨를 들썩이는

저 이파리들은

서로 손을 부여잡고, 꿀꺽꿀꺽 삼키며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발을 구르며

몸이 뒤집어지며, 때로 숨이 멎을 듯

콧물까지 훌쩍이며

울고 울고 또 우는

저 이파리들은

 

▶ 작가의 말

바람 부는 날 나무 잎새들을 보셨나요? 어찌 보면 즐거워서 깔깔거리고 춤을 추며 신이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슬퍼서 몸부림치며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똑같은 나뭇잎들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 상태에 따라 즐겁게도 보이고, 혹은 슬프게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찌 나뭇잎들만 그렇겠습니까? 바람 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람이나 상황도 마음가짐에 따라 즐겁게도 혹은 슬프게도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요?

 

임문혁

시인, 교육학박사

(전) 진관고등학교 교장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귀.눈.입.코』 등이 있다. [email protected]

[삶이 있는 시] 5월의 반성문 – 임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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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반성문

임 문 혁

 

어떤 사람이 넌센스 퀴즈를 냈다

‘반성문’이 영어로 뭔지 아세요?

금방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반성문은 영어로 ‘글로벌’이에요. 글로 벌!

아하, 그렇군요!

반성문을 가장 많이 써야 할 때는

12월이 아니라 5월이군요

1일 근로자의 날 – 모범 근로자가 아니었고

5일 어린이날 – 착한 어린이도 아니었었고

8일 어버이 날 – 효도도 못 했고

어버이다운 어버이도 못 되었으니까요

15일 스승의 날 – 스승의 은혜를 잊고 살았고

저 자신도 존경 받는 스승이 되지 못했으니까요

반성문을 써도 참 많이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아참, 그런데 반성문을 영어로 쓰라면 어떡하죠?

한문으로 쓰라 하면 또 어쩌죠?

큰 스승이요 은인 중의 은인이신 세종대왕,

그분이 태어나신 날, 5월 15일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쓰는 모든 글은 반성문이어야 마땅합니다

글로 벌, 글로 벌을 단단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한글로 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세종대왕님, 태어나셔서 참 고맙습니다

한글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작가의 말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세종대왕 탄신일 등 5월은 기억해야 할 날들이 참 많은 달입니다. 그런데, 그런 날을 맞으면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반성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후회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저는 세종대왕 탄신일을 잊고 살았다는 죄송함이 컸습니다. 우리들은 한글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편지 쓰고, 일기도 쓰고, 여러 가지 서류도 작성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국어교사를 했고, 한글로 시를 써서 시인이 된 사람이기에 그런 생각이 남보다 더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 신문도 한글로 발행되고, 여러분도 한글로 기사 내용을 파악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세종대왕님, 태어나셔서 참 고맙습니다. 한글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임문혁

시인, 교육학박사, (전) 진관고등학교 교장

1983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귀.눈.입.코] 등이 있다.  [email protected]

[삶이 있는 시] 봄, 강을 건너는 – 임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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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는

                     임 문 혁

 

강을 건널 때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바람바람도 따라왔다

가볍게 소매를 펄럭이며

함께 강을 건너고 있었다

 

바람이 강을 건널 때

바람도 혼자가 아니었다

물 위로 반짝이는 햇볕

햇볕도 바람의 겨드랑이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햇볕도 혼자가 아니었다

그 웃음 사이로 어느새 끼어든 봄이

안개꽃처럼 피어올라

물을 따라 흘러오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어느새 봄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봄은 언제 어떻게 온 것일까요? 저는 며칠 전 혼자서 한강을 걸어서 건너보았습니다. 아마 제딴엔 봄맞이 한다고 그랬을 겁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바람, 바람이 절 따라오더군요. 가볍게 소매를 펄럭이며 바람과 함께 강을 건넜지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바람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람 사이로 뭔가 하얀 이빨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있더군요. 맞습니다. 햇볕이었습니다. 햇볕이 물 위에 반짝이며 바람과 함께 강을 건너고 있었죠.

그뿐이 아닙니다. 또 가만히 살펴보니 햇볕도 혼자가 아니었어요. 햇볕의 등을 타고 햇볕의 품에 안겨 봄이 안개꽃처럼 강물을 따라 흘러오고 있는 거예요. 저에게 봄은 그렇게 왔습니다. 부드러운 바람과 따스한 햇볕과 함께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봄이 왔나요?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왔나요. 반갑게 맞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잘 살펴보면 봄 같은 사람, 봄 같은 일이 있을 겁니다. 이 봄에 새로 태어나  여러분 곁을 찾아온 봄 같은 신문 KOREAN LIFE를 반갑게 만나시고, 봄소식도 들으시고,이 신문과 함께하는 여러분의 삶이 봄날 같기를 기도합니다.

 

임문혁

시인, 교육학박사

(전) 진관고등학교 교장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귀.눈.입.코』 등이 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