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윤 캐롤라이나 열린방송에서 ‘박성윤의 영화는 내 인생’ 코너 진행, [email protected]

내일을 위한 시간 (2014)
DEUX JOURS, UNE NUIT
(two days, one night)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주연: 마리옹 꼬띠아르

금요일 오후, 산드라는 줄리엣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후 다급하게 우울증 약을 찾는다. “울면 안 돼. 버터야 돼.” 혼잣말을 반복하는 산드라에게는 안타깝게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보인다.

냉정한 사회 현실 속에서 인간의 양심과 윤리를 다루는 작가주의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의 프랑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렇게 위태롭게 시작된다.

보너스 vs 동료
우울증 때문에 병가를 냈던 산드라가 복직 신청을 하자, 사장은 반장을 통해 직원들에게 한 가지 은밀한 제안을 한다. 산드라의 해고에 찬성하는 투표를 해주면 1,000유로 (약 $1,200)의 보너스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우울증을 앓는 동료를 선택할까, 아니면 $1,200 보너스를 선택할까?

투표 결과 16명 중 14명이 보너스를 선택했고, 2명만이 산드라의 편이 되어주었다. 이제 산드라는 해고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산드라의 편에 섰던 줄리엣이 산드라에게 전화해, 이번 투표는 반장의 강요 때문에 공정하지 못했으니 사장을 찾아가 재투표를 요구하라고 설득한다.

결국 산드라는 줄리엣과 함께 사장을 찾아가고, 사장은 이의제기를 받아들여 이틀 뒤인 월요일에 재투표를 할 기회를 준다. 그런데 정작 산드라는 사장과 얘기하는 내내 목이 메인 채 줄리엣의 뒤에 서 있을 뿐이다.

이제 산드라는 주말 이틀 동안 14명의 동료들에게 보너스 대신 자신의 복직에 손을 들어 달라고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녀는 재투표 결과에 자신이 없고, 또한 동료들에게 동정심을 구걸해야 하므로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남편의 설득과 도움으로 마침내 동료들을 직접 한 명씩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들의 삶
동료들의 삶 역시 녹록지 않다. 아이들 학비 때문에 타일을 모아서 팔고, 주말에는 부업을 하고, 불법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료들의 삶을 마주하며, 산드라는 체념의 자세로 설득의 말을 건넨다.
“네가 나를 위해서 투표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네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도 이해해…”

산드라와 가장 친했던 나딘은 산드라를 만나는 것조차 피하고, 안느는 남편과 다시 상의하고 알려주겠다고 하지만 이미 남편과 그 문제로 다툰 듯 보인다. 티무르는 저번 투표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며 이번에는 산드라를 위해서 투표하겠다고 약속하며 지난 날 산드라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고마운 일을 회상하고 눈물을 흘린다.

산드라에게 투표하려고 생각하던 이본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얻어 맞고 정신을 잃는다. 이본의 아들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산드라에게 소리친다. “보너스는 내가 일해서 받는 거야. 왜 네가 그걸 뺏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알퐁소는 이웃을 돕는 일은 신의 뜻이라며 산드라의 손을 잡아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후에도 그의 표정은 내내 불안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회사에 잘 보여야만 다시 계약이 가능한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가장한 강요
보너스와 산드라를 놓고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빠진 동료들은 결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진정한 ‘선택’일까.

아이들 학비를 위해 타일을 모으고, 불법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위해 아내를 윽박지르고, 아들이 아빠를 때려 기절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서 돈이냐, 인간이냐의 선택은 사실상 답이 정해진 문제와 같다. 돈 때문에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돈 말고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인간의 실존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자유의지가 발현될 수 없는 양자택일의 상황은 이미 ‘선택’이 아니라 ‘강요’인 것이다. 그에 더해 ‘투표’라는 민주적인 절차로 자본가의 편법이 교묘하게 가려지는 상황 역시 눈여겨 보아야 할 체제의 모순이다.

고립, 그 철저한 외로움
산드라가 동료들에게 계속 거절을 당하면서 더 이상 설득을 포기하고 돌아와 침대에 누우며 말한다.
“너무 외로워…”

‘외로움.’ 문득 작년에 상영했던 최승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공범자>의 한 장면, 김민식 PD의 독백이 생각난다. 페이스북 라이브 영상으로 ‘김장겸은 퇴진하라’를 공개했을때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이렇게 했는데 다른 사람이 아무도 따라하지 않으면 결국 당신은 혼자 또라이 되는 거야.”
이 말을 옮기면서 김민식 PD의 해맑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며 오열했다. 그를 이토록 두렵게 한 것이 무엇일까. 인간은 자신이 소수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본능적으로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침묵하게 된다. 그 침묵의 소용돌이를 깨고 나온 김민식 PD의 두려움은 지금 이 순간 내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오직 나 혼자뿐이라는 외로움과 고립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혼자 외롭게 지키고 있던 썰렁한 MBC 로비에 그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그리고 삼삼오오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꽉 채우고 다 함께 같은 구호를 외치던 그 연대의 감격이 오버랩되었다.

삶, 그 경이의 순간에 ‘사람’이 있다
이틀 동안 동료들 한 명 한 명의 고단한 삶과 마주하며 신경이 너덜너덜해진 산드라는 어느 순간 감정이 바닥으로 치달으며 우울증 약 한 통을 입 안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컴컴한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찰나에 남편이 산드라를 부른다. 안느가 찾아왔다고.

안느는 몇 시간 전에 산드라의 편을 들겠다고 했다가 남편과 심하게 싸워 산드라가 포기하고 돌아온 동료였다. 그런데 안느가 말했다.
“나 너에게 투표할 거야. 그리고, 남편과 이혼할 거야. 나를 위해 뭔가 결심한 건 처음이야. 내가 찾아와줘서 고맙지? 나도 네가 찾아와줘서 고마웠어.”

몇 분 전에 죽으려고 약을 털어 넣었던 산드라의 얼굴에 어느 새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산드라의 다급한 한마디. “근데… 나 지금 막 약 한 통 먹었어…”

서둘러 병원에서 위세척을 하고 돌아오는 길. 그들의 차 안에선 락엔롤 음악이 터져 나온다. 안느와 산드라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며 락엔롤 가사 중 “글로리아”를 목청껏 외친다. 안느와 눈빛이 마주친 산드라는 방금 전 자신의 자살시도에 대해 후회할 겨를이 없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자기 손을 들어준 단 한 명의 친구와 함께 벅찬 마음으로 삶의 향연을 즐기는 중이니까.

다시 사랑할 수 있어
월요일 재투표 결과는 8:8. 과반수를 넘지 못해 결국 산드라의 복직은 수포로 돌아갔다. 산드라는 1,000유로를 포기하고 자신의 편에 서준 8명의 동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담아 깊은 포옹을 나눈 후 짐을 챙겨 나오는데 사장에게서 호출이 온다.

자신을 지지해준 동료들과 작별하는 산드라 © The Magic Lantern

“8명이나 설득하다니… 직원들의 정서를 감안해 보너스 지급과 당신의 복직을 둘 다 허락하겠소. 그런데 당장은 아니고, 비정규직 재계약이 2달 후니 그때 나오시오.”
“아니요. 다른 사람을 해고하고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순 없어요.”
“해고가 아니죠. 비정규직이니 계약을 안 하는 것뿐이죠.”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산드라. 주어진 답안지를 찢어 버리고 자신의 존엄을 ‘선택’한 그녀의 작고 굽은 어깨가 이제 더 이상 안타깝지 않다.

산드라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여보, 우리 잘 싸웠지?”
우리는 사장의 태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 겉으로 보이는 대립구도는 산드라와 그녀의 복직을 반대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반장과 직원들이다. 그런데 이 싸움을 붙인 사람은 바로 사장이다. 사장은 ‘갑’으로서 을과 병에게 싸움을 시키고 멀리서 관망할 뿐이다. 늘 객관적인 입장에서 감정의 동요가 없는 사장의 태도는 그래서 더욱 더 불쾌감을 준다.

연대, 타인을 보살피는 마음
얼마 전 한국에서 오랫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직장의 노조위원장이 되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노조원들이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관심이 있고, 비정규직을 대변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사실이 믿어지냐고…

소수가 단지 좀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 모인 연대는 불안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엮어주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내 밥그릇 너머의 그 무엇. 산드라의 동료들이 1,000유로의 보너스를 포기하고 다른 동료의 삶을 보살피고, 산드라가 복직을 포기하면서 비정규직 알퐁소를 보호하게 만든 그 무엇.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관심, 연민, 애정, 사랑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타인에 대한 그런 긍정적인 감정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우리가 자주 잊고 살지만, 이 모든 사랑의 감정은 원래부터 우리 안에 있다. 산드라가 힘겹게 동료들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소용돌이쳤고, 산드라 역시 동료들의 삶의 서사를 마주한 순간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관계를 맺기 위해 먼저 찾아가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모든 연대의 시작이 아닐까.

산드라가 걸어 나간 주차장의 소음 속에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간다. 감독의 의도일까? 주차장의 그 에누리 없는 현실적인 소음은 현재 나의 시공간과 오버랩된다. 영화는 끝났지만,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온 사람들은 이 현실의 소음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삶은 오늘도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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