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실망의 끝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축복의 자리이다. ©kimpsikoloji.com
심연희
NOBTS 겸임교수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RTP지구촌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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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은 기대를 낳고
삶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을 옮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 나은 기회, 승진, 연봉 등을 목표로 이직을 하고 보면, 이전 직장에서 느꼈던 회의감, 인간관계의 어려움, 한계, 반복되는 실수 등으로 인해 또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직장을 옮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묘하게 비슷한 문제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소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저쪽 모닥불이 뜨거워서 뛰쳐나왔는데, 이제는 집에 불이 난 화재 현장에 뛰어든 느낌이에요.”

교회를 옮기는 일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과정에는 상실감이 수반된다. 직장이나 다른 일로 교회를 멀리 떠나는 경우에는 서로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 살면서 교회를 옮기는 경우에는 대개 그 상실감을 넘어서는 실망과 상처, 갈등으로 얼룩진 이야기가 있다. 상처를 받아서 떠나거나, 또는 그만큼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준 후에 떠나기도 한다. 때로는 긴 싸움 끝에 마치 이혼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일처럼, 가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모두 힘이 든다.

교회를 옮기며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들이 차갑고 무례해요.”, “목회자가 사랑이 없어요.”, “말씀이 은혜가 안 돼요.”, “심방을 안 해요.”, “본이 될 만한 사람이 없어요.”, “사람들이 다 자기 맘대로예요.”, “친구가 없어요. 새로 온 사람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찬송가를 안 해요. 찬양이 은혜가 안 돼요.”
그런데 옮겨간 교회에서도 바로 그 똑같은 이유 때문에 다시 새로운 교회를 찾아 떠나간다. 자기가 선택한 믿음의 공동체에 자신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기대는 다시 실망을 낳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 새로운 교회를 만날 때 우리는 기대감에 부푼다. 이 사람만큼은, 이 곳만큼은 자신의 지난 상처들을 잊게 하고 회복시킬 대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자기 내면의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을 가지고 또 다른 친구, 또 다른 배우자, 또 다른 동료, 또 다른 목회자에게 기대를 건다. 그리고 이번엔 분명 지난 번과 다르리라 생각한다.

성격장애를 가진 경우, 이 기대감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크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 완벽한 상황을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밑빠진 독처럼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안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환경에 매달린다. 지금까지 자기 삶에 없었던 부모의 따뜻한 사랑, 인정, 나의 어떤 모습도 모두 다 품어주고 사랑해줄 가족 같은 관계를 갈망한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줄 이상적인 환경을 지금 이곳에서 찾고 또 찾는다.
하지만,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없다는 말처럼,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시 한번 깊고도 어두운 배신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를 또 한번 무너뜨린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다시는 누구도 믿지 않겠다고. 결국 다 똑같은 인간들이라고.
상담소에서는 이렇게 자신만의 단단한 껍질 속에 숨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또 다시 상처받기보다는 차라리 철저한 외로움을 선택하는 것이다.

누구나 갖는 삶에 대한 기대 끝에 따라오는 이 실망의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맨날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가족에 대한 실망, 친구나 동료에 대한 배신감,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실망의 끝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음을 거듭 확인하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할까? 요즘 너무나 흔해진 ‘가나안(안나가)’ 성도처럼 교회를 등져야 할까? 아니면 세상과 단절해야 할까?

축복의 자리
복음 전도자이자 작가인 베스 무어(Beth Moore)는 사무엘상과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모습을 묵상하며, 기대감 끝에 닥쳐오는 깊은 실망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양을 치다가 얼떨결에 기름부음을 받고, 사자와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에게 발탁되어 왕궁으로 올 때, 소년 다윗의 부푼 가슴과 벅찬 기대감을 그린다.
그런데 그의 왕이자 영웅이며 장인이었던 사울이 철천지 원수이자 적으로 돌변할 때, 뼈아픈 실망감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청년 다윗. 그 배신의 역사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자신의 아들이 반역을 꾀했다.

실망감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우리 모두가 경험한 적이 있는 낯익은 자리다. 그 고통을 다시 경험할까봐 두려워 아예 거리를 두고 벽 뒤로 숨기도 한다.
그러나 베스 무어는 그 실망의 자리가 얼마나 큰 축복의 자리인지 역설한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게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가짜 위안을 향해 달려가다 비로소 멈춰 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환경에 나를 의탁하기엔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지지 않는 기대감으로 지친 우리의 심령이 쉴 수 있는 진짜 안식처를 찾게 되는 순간이다. 어떤 사람이나, 환경이나, 소유물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자리이며, 경배해야 할 대상이 비로소 분명해지는 통찰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가 되시는 그 유일한 분, 하나님께서 참된 위로를 찾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그 실망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지독하게 실망시킨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아프게 한 가족, 학교, 직장, 신앙 공동체,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신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이 가진 비현실적인 기대감의 잣대를 낮추고, 부족한 상대를 용서하고 섬길 기회로 초대하신다. 실망의 그 자리가 바로 진정한 경배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뼈아픈 배신의 자리가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배운 축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기대감에서 벗어나 진정한 안식을 만나고, 그 지친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도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이다. 다시 보듬고 다시 사랑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