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영속화하는 입학제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대학인 하버드는 학생들을 정치, 경제, 기술 분야의 최상위 계층으로 진출시키는 능력 덕분에 수많은 학생들이 입학을 열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미국의 미래 지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는 골든 티켓을 받을 학생을 선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의심을 받아왔고, 최근 법원 소송에서 하버드가 졸업생 자녀를 포함한 ALDC(Athletes, Legacies, Dean’s interest list, Children of faculty, 운동선수, 기부자 및 동문 자녀, 학장 추천, 교직원 자녀)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레거시 입학(Legacy Admissions)으로 알려진 이 입학 정책은 아이비리그의 8개 대학교와 기타 많은 사립대 및 엘리트 공립대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는 지원자의 부모나 가까운 친척이 해당 학교에 다녔다면 유사한 역량을 갖춘 다른 지원자보다 더 선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원에서 밝혀진 증거들은 하버드가 레거시 제도를 이용해 일부 지원자들을 대기열을 건너뛰고 하버드에 입학하게 하는 방법을 공개했다. 그러자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인 파벨 파야노(Pavel Payano) 의원부터 하버드 학생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정책의 종료를 요구하게 되었다.
대법원 사건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하버드는 ALDC 후보자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레거시 입학 지원자는 전체 지원자의 5%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무려 합격자의 1/3을 차지하며, ALDC 지원자의 70%가 백인이었다. 레거시 입학 제도의 이 특별한 이점은 미국 엘리트층의 성층권으로 향하는 로켓이었다.
상위 1%로 가는 지름길
하버드 대학과 브라운 대학에 기반을 둔 연구 그룹인 오포튜니티 인사이트(Opportunity Insights)가 최근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동일한 점수를 받은 레거시 지원자가 일반 지원자에 비해 합격할 가능성이 4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에서는 12개 사립 ‘아이비 플러스(Ivy Plus)’ 대학교(아이비 리그의 8개 대학교 –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유펜, 콜롬비아, 코넬, 다트머스, 브라운 + MIT, 스탠포드, 듀크, 시카고 대학)의 15년간의 입학 데이터를 조사했다.
그 결과 레거시 제도로 입학한 학생들이 레거시 제도가 없는 다른 최고 대학에 지원했을 때 합격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전미경제연구소(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의 연구에 따르면, 하버드에 ALDC로 합격한 백인 학생의 75%가 일반 학생으로 입학 사정을 했다면 ‘불합격’했을 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거시 제도로 아이비 플러스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일반 대학에 다닌 학생들에 비해 미국 사회의 상위 1%에 들어갈 가능성이 60% 더 높았고, 의학, 법률, 금융 및 기타 연구 분야의 최고 직장에서 일할 가능성이 3배나 더 높았다.
이번 연구를 공동 집필한 브라운 대학교(아이비 리그 학교)의 존 프리드먼(John Friedma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 이 캠퍼스에 있는 학생들은 내일 미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리더가 될 것입니다. 모든 배경의 학생들이 리더십 위치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느끼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들 대학이 더 폭넓은 기회 평등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입학시켜야 합니다.”
레거시 제도의 뿌리는 백인 보호 및 이민자 차별 정책
레거시 입학 제도는 20세기 초반 미국이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이민자 인구가 급증하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민자 인구의 증가는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대학 역시 이민자 인구의 증가로 인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아이비 리그 대학들은 그 당시 고등교육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백인 상류층의 자녀들이 주로 입학하고 있었다. 대학들은 이민자 인구의 증가로 인해 백인 상류층 자녀들이 입학하기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였고, 이에 따라 레거시 입학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졸업생의 자녀에게 입학시 우대를 주는 제도였다. 대학들은 레거시 입학 제도를 통해 백인 상류층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레거시 입학 제도 최초로 도입한 학교는 하버드였다. 하버드는 1870년대부터 레거시 입학 제도를 시행해 백인 상류층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행하던 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1920년대에는 아이비 리그 대학뿐만 아니라 다른 명문 대학들도 레거시 입학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레거시 입학 제도는 이처럼 처음부터 백인 상류층 자녀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고, 부유층 자녀들은 학업 성적이나 다른 요소에 관계없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레거시 제도가 대학의 공정성과 다양성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최근에는 레거시 입학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여러 주에서 이미 레거시 입학 제도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하버드의 변명
레거시 제도가 시작된 때로부터 150년이 지난 오늘날은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다양성과 형평성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하버드는 이 낡은 입학 제도를 지금도 옹호하고 있다. 그들은 이 제도가 “대학과 졸업생 사이에 평생 지속되는 강한 유대를 굳건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레거시 제도를 없애면 동문들이 제공하는 “관대한 지원”이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실제로 하버드는 500억 달러라는 세계 최대의 대학 기부금을 보유하고 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각각 70억 달러의 기부금을 보유한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하버드가 이 풍부한 자금으로 국가 엘리트층을 세습하고 현상 유지를 꾀하며 불평등을 영속화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파벨 파야노 상원의원은 “미국인들을 하나로 묶는 것 중 하나는 능력주의 사상”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하버드 학생 루이스 로세티는 세계여러 나라 대학들이 레거시 제도 없이 우수한 학문적 환경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대학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