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éronique Chemla
박성윤 캐롤라이나 열린방송에서 ‘박성윤의 영화는 내 인생’ 코너 진행 [email protected]

이민자 (2013)
The Immigrant
감독: 제임스 그레이
주연: 마리옹 꼬띠아르,
호아킨 피닉스, 제레미 레너

남북전쟁 시기 미국은 군인으로 참전할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유럽 이민자들을 적극 받아들였으나, 1920년대 들어 국민들의 적색공포와 사회 불안을 외국인에 대한 혐오로 대치시키며 모든 종류의 이민을 제한하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영화 <이민자>는 그 시절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민자들의 삶과 사랑을 조명한 영화다.

전쟁난민 에바와 마그다
폴란드에서 온 에바와 그녀의 동생 마그다는 뉴욕의 엘리스 섬에 막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그런데 이들의 표정이 초조하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마그다가 병에 걸렸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입국이 거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마그다는 결핵으로 6개월 격리조치를 당하고, 설상가상으로 에바가 보호자로 써낸 이모의 주소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에바 역시 입국이 보류되고 만다.

에바는 폴란드에서 영국대사관 간호사로 일했다. 그런데 소비에트와 전쟁이 일어나 에바와 마그다의 부모는 러시아 군인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에바와 마그다는 유일한 혈육인 이모가 있는 미국에 가면 안전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그래서 이들은 단순한 이민자가 아니라 전쟁난민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고도 엘리스 섬에 발이 묶이고 만다. 보호자의 주소지 불명으로 입국이 거부되면 강제출국을 당하게 될 절박한 상황. 그때 그들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낯선 남자 브루노가 나타난다.

험난한 이민 생활의 시작
브루노는 에바에게 다가와 동생의 치료비용을 댈 수 있는 일자리를주선해주겠다고 제안하고 뒷거래로 입국보류 명단에서 에바를 빼내준다. 브루노는 밴디츠 루스트라는 삼류극장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쇼를 하며 동시에 그녀들의 포주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다. 브루노는 에바에게 자유의 여신상 분장을 시켜 무대에 내보내는데, 긴장한 에바에게 여자들이 독한 술을 먹인다. 그리고, 한참 후 술에서 깨어난 에바 앞에 낯선 청년이 서 있다. 에바가 매춘을 거부하자 브루노가 이렇게 말한다. “나도 너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결국 너는 저 녀석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왜냐하면 지금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네 동생이니까.” 브루노는 에바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매춘을 강요한다. 그런 브루노 역시 손님의 돈과 권력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내줄 수밖에 없는 패배적이고 타율적인 삶을 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오욕의 시간을 보내고 에바는 이모의 집을 찾아 나선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이모의 집을 찾아가니 주소지 불명이라던 그곳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 이모와 이모부를 만나게 된다. 에바의 이모는 그녀를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이튿날 잠에서 깬 에바를 맞이한 건 분노에 찬 이모부와 경찰이었다.

미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던 에바에게 사람들은 대신 매춘을 강요했고, 그곳에서 ‘부정한 행실’을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모부는 수치스럽다며 경찰을 불러 에바를 내쫓은 것이었다. 에바를 도와줄 아무런 힘이 없는 이모는 그저울음을 삼키며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민자들의 사랑
강제추방을 위해 엘리스 섬으로 다시 보내진 에바는 그곳에서 혹시나 동생 마그다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며 억류자들을 위한 공연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마술쇼를 하는 브루노의 사촌 동생 올랜도를 만나게 된다.

올랜도는 공중부양 마술을 선보이는데 에바의 시선은 진지하고 거룩하다. 강제추방이라는 벼랑 끝에 선 에바에게는 가뿐히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그 모습이 매혹적으로 다가왔으리라. 올랜도는 첫눈에 에바에게 끌리게 되고, 에바 역시 브루노와는 달리 다정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다음 날 억류자 보호소에 나타난 브루노는 에바를 다시 데려가려고 한다. 에바는 인생 막장인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생의 치료비를 위해 돈이 필요했기에 고민 끝에 결국 브루노를 따라 나선다.

올랜도가 마술 공연을 하러 밴디츠 루스트 극장에 오게 되고, 공연 중 무대 뒤에 있던 에바를 발견하고는 즉흥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무대에 올린다. 얼떨결에 자유의 여신상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서게 된 에바에게 올랜도가 질문한다. “이곳 미국에서 바라는 게 있나요?”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러자 술 취한 관중들이 그녀에게 창녀라며 저속한 야유를 퍼붓고, 브루노는 에바를 욕보인 올랜도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주먹을 휘두른다. 순식간에 극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극장 주인은 브루노와 여자들을 그 자리에서 해고해 버린다.

여자에게 더 가혹한 삶의 굴레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안전과 행복을 찾아 미국에 온 에바의 희망과, 삼류극장의 싸구려 소품으로 자유의 여신상 분장을 하고 매춘으로 돈을 버는 에바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냉혹한 현실을 일깨운다. 여성에게 정숙하고 타율적인 삶을 강요하는 남성 중심의 기독교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민자 여성으로서 살아남는 일은 에바에게 필사적인 노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브루노와 올랜도 역시 이민자로서 어떤 일도 불사하는 태도로 살아가지만, 의지할 곳 없는 이민자 여성으로서 에바는 돈과 권력, 사회적 관습과 도덕 윤리라는 거대한 구조의 최하층에 놓인 약자일 수밖에 없다.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올랜도가 에바에게 돌아와 동생 마그다를 데리고 같이 캘리포니아로 떠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때마침 들어온 브루노에게 올랜도는 총알없는 총을 겨누며 에바를 떠나 보내라고 협박한다. 에바를 떠나 보낸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브루노에게 울랜도는 방아쇠를 당기고, 그 순간 브루노는 올랜도를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던 브루노의 쇼걸은 경찰에게 에바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거짓 진술을 하고 에바는 경찰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자아의 결핍과 가학적 사랑
사회적 존재로서 서로 융합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이 욕구는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며 남녀 간의 사랑 역시 이에 기반한다.

그러나 그 관계가 수직적이고 지배적인 것이라면 이것을 융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지배와 소유의 관계일 뿐이다. 이러한 사랑에서는 지배자 또한 고통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미성숙하고 결핍된 자아로 인해 그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구원한 에바
이 영화를 연출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에바는 고전적 의미의 영웅이며 우리는 여주인공을 통해 숭고한 감정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영화가 구원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이 영화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나 에바의 기도 장면, 묵주 목걸이, 그리고 성당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며 ‘구원’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언급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자유의 여신상또한 ‘구원의 여신’으로서 이민자들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자유의 여신은 늘 뒷모습이나 옆모습으로만 보여지며, 그것은 또한 싸구려 소품으로 분장한 에바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결국 에바를 구원해준 것은 교회도 아니고, 브루노나 올랜도도 아니었다. 에바가 성축절을 맞아 교회에 가서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을 눈여겨 보자. 에바는 배 안에서 먹을 것이 없어 살아남기 위해 몸을 이용했다며 그것도 죄가 되는지 묻자, 신부는 ‘죄’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죄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남자와 함께 있다고 하자, 신부는 그 남자를 떠나서 죄를 그만 짓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생존조차 위협받는 처절한 현실속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결국 에바를 구원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숙모를 찾아가 마지막 도움을 청해 얻은 돈으로 동생 마그다를 데리고 나와 비록 또 다른 진창일 수도 있는 아메리칸 드림과 행복을 찾아 새로운 길을 떠난다.

용서와 치유
브루노는 에바와 마그다에게 캘리포니아로 가는 기차표를 건네며, 자신이 그녀에게 행한 집착과 폭력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은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비통하게 흐느낀다. 에바는 그렇지 않다며 그를 안아주고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자신과 함께 있으면 에바가 평생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도망자로 떠돌게 될 거라며 그녀를 떠나 보냄으로써 브루노는 비로소 성숙한 사랑을 완성한다.

마지막 장면에 배를 타고 떠나는 에바와 비틀거리며 문을 나서는 브루노의 모습이 한 화면에 나란히 보여진다. 에리히 프롬이 『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에서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됨과 동시에 둘로 남는 모순’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그들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떠나가는 모습은 마음 깊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더 나은 이민자의 삶을 꿈꾸며
이 영화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이란 저 너머의 희망을 향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20년대의 시대적 배경으로 조명한 영화임에 불구하고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듯하다.

이민자뿐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단지 살아 남기 위해 진창을 뒹구는 대신, 인간으로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 누리고 싶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충분히 발현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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