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받으러 간다고?
요즘은 한국에서도 상담이 비교적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상담소의 문턱을 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많은 이민 1세들은 자기가 이민을 오던 시기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를 보러 간다는 말은 마치 시장 간다는 말처럼 쉽게 하며 어디가 아픈지, 어느 의사나 병원이 좋은지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만, 상담에 대해서는 ‘아니, 왜???’ 하며 의구심 어린 시선과 수치심을 먼저 떠올린다.
더욱이 미국에서 자란 자녀들이 상담을 받고 싶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힘든 일이 있어도 마음 단단히 먹고 강한 정신력과 영성으로 이겨내야지, 무슨 상담까지 받을 필요가 있느냐고 말린다. 그래서 어쩌다가 상담을 요청하는 ‘희귀한’ 한국분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상황이 이미 심각한 경우가 많다. 자녀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가정폭력이 일어나고, 그 결과 아동보호기관에 아이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거나, 이미 한쪽 배우자가 이혼을 결심하고 법적 수속을 밟을 때쯤 상담소를 찾기도 한다. 중독으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문제를 깨닫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과 치유의 역사들을 보지만, 이미 상처 입고 신뢰를 잃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때로 자신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기를 바라며, 괜찮아질 거라고 자위하다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진작에 짜내면 좋았을 작은 염증이 수술을 해야 하는 큰 종기가 될 때까지 내버려둔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자리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는다.
작은 문제들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많은 일들이, 사실은 별것도 아닌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부모에게 무언가 말을 할 때 대수롭지 않게 넘긴 작은 순간들이 쌓여, 큰 일이 일어날 때까지 부모를 찾지 않는 이유가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알려고 하기보다 감정이 격해져 야단부터 친 몇 번의 순간들이 대화의 통로가 막힌 시점이 되기도 한다. 아내가 힘들어 할 때 ‘그 날’이냐며 농담으로 때운 순간들이 쌓여, 끝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그저 아내의 기분이 안 좋아 내뱉은 짜증스러운 말, 비교하는 말들이 남편을 집 밖으로 밀어내는 이유가 된다. 교회가 반쪽 나는 가슴 아픈 일들도 알고 보면 저마다 교회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 말은 꼭 해야겠어서 목청을 높인 순간들이 쌓인 결과일 때도 있다.
이처럼 인간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유리잔 같다. 가까운 사이에서도 작은 일에 쉽게도 상처받고, 금방 오해한다. 우울증, 불안증, 성격장애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시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의 생각과 시야가 훨씬 더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 상처와 오해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볼 새도 없이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이를 뒷바침하는 증거들만 눈에 들어온다. 눈덩이처럼 커진 오해를 그대로 방치하다가 이내 확신으로 굳어진다.
지레짐작
S씨는 얼마 전 새로 옮긴 교회에서 너무나 상처를 받아 몇 주 동안 예배를 빠졌다. 교회 일을 많이 맡아 하시는 한 리더가 자기를 모른 척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도 잘 걸면서 S씨를 보면 인사도 안 하고 경계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참여하는 모임에 자신을 초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S씨는 확신했다. 그 사람이 분명 자기 흉을 보고, 없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고 있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전에는 반가워하던 몇 사람이 요즘 자신을 피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는 결국 다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서 편협하고 적대적인 성격이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반대로 S씨는 자신이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자신에 대해 소개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이 지역에 이사 와서 느끼는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그 사람과 오픈해서 나눈 적도 없었다.
인간의 지레짐작은 자주 틀린다. 그래서 혼자 넘겨짚기보다는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정확하게 물어보는 것이 현명하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 묻지 않으면 상대가 그저 내성적인 사람인지, 최근에 무슨 일이 있어 정신이 없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따라서 지레짐작은 스스로 상처받기로 이미 작정하는 것이다.
바로바로 해결하기
성격장애 치료의 권위자인 마쉬 리한(Marsh Linehan)은 우리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대인관계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제안하는 첫 번째 훈련은 문제나 상처가 쌓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작은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작은 문제일 때 바로바로 해결하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손가락을 살짝 베었을 때 바로 약을 바르면 될 일을 방치해서 손가락을 자르게 되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다. 작은 일을 바로바로 해결하는 훈련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포기하고 살까? 상대방의 대답을 뻔히 알 것 같고, 상대방의 행동이 뻔히 예상되어서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상대방이 짜증내고 화낼까봐 두려워서 뭐가 문제인지 묻기조차 피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도 상대방과의 사이에 조금 더 높은 벽을 쌓아간다. 그저 늘 하던대로 짐작만 한다.
가까운 가족끼리는 더 심각하다. 어떻게 나올지 다 안다는 확신이 몇 배나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한 걸음에 쉽게 넘을 수 있었던 벽이 어느새 서로의 머리카락도 안 보일 만큼 높은 성벽이 된다. 그때 그 한 걸음을 떼지 않고 물러난 결과, 관계가 깨진 후에 때늦은 후회를 한다.
용기 있는 한 걸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서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살아계신 게 맞냐고 의심하고,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냐고 비난하고, 스스로 죄 지으며 멀어지고, 바쁘다고 무관심해질 때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직도 먼저 다가설 용기가 없는 우리라서, 작은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우리라서, 사소한 비난조차 두려워하는 우리라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 벽을 허무신 예수님께 매달려서 우리 앞에 놓인 작은 벽을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까지 미뤄서 좀 더 높아질 그 벽을 오늘 카톡 한 번으로, 전화 한 통화로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번에 헐어내기는 힘들지라도 오늘 한 번의 용기가 화평을 향한 작은 한 걸음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