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지나가는 사람 곁에서 그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아주자. ©CanStockPhoto
심연희
NOBTS 겸임교수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RTP지구촌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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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멀어진 이유
아버지께서 췌장암으로 돌아가실 무렵,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발길을 끊었다며 노여워하시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께서 오래 병상에 계시는 동안 발길이 뜸해진 친지들에 대한 원망까지 더해져, 힘들 때 멀어져 간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하셨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밥이라도 사주고 용돈이라도 쥐어줄 때는 친한 척, 존경하는 척하던 사람들이 막상 아버지가 힘들고 아플 때는 등을 돌리는 모습에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깊어지시는 듯했다. 항암치료의 고통과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만큼이나 아버지를 괴롭혔던 것이 그 고립감과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세상에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거나, 손해가 난다 싶으면 당장 멀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마도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때로는 그런 이기심보다, 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거리를 두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렇게 소식이 뜸하시냐, 아버지께서 보고 싶어하신다”고 연락을 하자 한 친지가 말하기를,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아파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겠냐고 했다.

불편한 감정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세요”, “힘 내세요”라고 말하기도 어색하다. 그 병에 무슨 음식이 좋다더라는 이야기조차 부질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차라리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맘이 편하다. 해결해주지 못할 바에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싶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 때문에 상실과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 곁에서 뒷걸음질 친다. 불편한 감정, 도와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이 불편함은 어쩌면 도와준다는 의미를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남편이 힘들어 하는 아내의 곁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해줘도 행복해지지 않는 아내를 보며 무력감에 슬슬 피한다. 아내는 깊은 늪을 지나는 남편을 향해 정신 차리라고 채근하거나 그의 감정 상태를 서둘러 고치려고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성장통을 겪으며 힘들어할 때 그런 건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진짜 고생이 뭔지 몰라서 배부른 소리한다고 오히려 타박한다. 위기에 수반되는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사람들 대부분이 그 감정을 고쳐주려고 하거나, 고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피해 버리는 것이다.

곁에 있어주는 사람
저명한 목회상담가인 폴 투르니에는 <고통보다 깊은>이라는 책에서 고통과 위기가 닥쳐오는 순간을 코앞에서 기차가 지나는 것에 비유한다. 눈 앞에서 무서운 기세로 지나가는 기차의 경적소리는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기차가 지나가고 저만치 사라져갈 때까지 우리는 기차의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한다. 기차가 내 앞을 지나가는 순간에는 옆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때는 그냥 그 사람을 붙잡고 가만히 서 있는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어느 교회의 세미나에서 한 자매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몇 년 전 청년집회에 참석해 내게 상담을 받았단다. 그런데 그때 내가 해준 말은 기억나지 않는데, 자기가 엄청나게 울었던 것만 기억난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는 어찌어찌 잘 해결되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힘들어하며 울었나 싶다며 멋쩍게 웃길래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사실 나도 그때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무슨 말을 해주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상담자로서 해주는 지혜의 말은 누군가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좋은 말 몇 마디로 상대방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위기에서 구해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먼저 실컷 울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것이 아닐까. 기차가 거센 바람을 몰고 경적을 울리며 내 앞을 지나갈 때, 그 엄청난 위압감에 풀썩 주저앉아 목놓아 울 수 있게 가만히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함께 웃는 날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 16)’고 말한다. 상담의 기술을 나열한 수많은 교재보다 이 한마디의 말씀이 상담의 핵심을 더 무게있게 전달하는 것 같다.
상실과 고통을 지나가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하지 않다. 섣부른 조언이나 성급한 문제해결이 아니라, 마음 편히 실컷 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어둠의 골짜기를 잘 지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화나고 외로운지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어느 순간 기차는 지나간다. 터널 끝에서 빛을 만나고, 함께 웃는 날도 온다.

“아픈 사람 옆에서 굳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보고 싶은 얼굴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겠느냐”는 나의 말에 그 친지는 아버지의 병문안을 왔고, 오랫만에 마주한 얼굴이 반가워서 아버지의 얼굴도 환해졌다. 그날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가 세상과 작별하는 마지막 여정 속에 그저 함께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상실감이 조금은 옅어졌는지, 남겨진 가족들이 아버지를 기억하며 함께 웃곤 한다. 그 위기와 상실의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지나가신 아버지도 지금은 천국에서 웃고 계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