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순간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산과 계곡과 평지가 이어진다. 마음으로는 늘 꽃길만 걸으며 좋은 일만 경험하고, 매일매일 기쁨과 축하 속에 살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고 피하고 싶어도 우리 삶에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슬픔이 존재한다. 바로 상실의 순간이다.
상실은 여러 모습으로 다가온다. 팬데믹처럼 일상의 삶을 통째로 빼앗기는 경우도 있고, 사업을 접을 때, 직장이나 교회를 옮길 때, 이혼할 때, 연인과 헤어질 때, 친했던 사람과 절교할 때 등등 다양한 이별과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깊은 상실감도 있다. 아이가 자라 내 품을 떠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열정을 불태우던 직장에서 은퇴할 때, 꽃답던 젊음이 스러지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떠나고 떠나보내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어떤 상실은 날마다 조금씩 마음을 준비시키며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의 삶에서 귀중한 무언가를 통째로 뜯어가 버린다. 그런 상실의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떠난 자리
평소에 자주 얼굴을 보고 수다 떨며 웃던 분의 갑작스러운 소천 소식을 듣고 황망한 심정으로 장례를 준비한 적이 있다. 장례식은 한 사람의 인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헌신했는지,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집에 남겨진 10벌이 넘는 가죽코트, 먼지 쌓인 옷가지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쓰레기 봉지에 담겨진다. 훌쩍 떠난 인생은 때로는 씁쓸하고, 때로는 가슴이 무너지고, 때로는 진한 감동을 남긴다. 우리가 움켜 쥐고 쌓으려고 그렇게 애쓰던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음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된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홀연히 홀로 가는 길임을 알게 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며 우리의 마음에 유익하다(전 7:2-3)’는 말씀의 뜻은 아마도 먼저 떠난 사람의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실과 애도의 5단계
한 아이가 태어나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적응해가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런데 한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일도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이자 임종 연구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로스 박사는 상실을 경험하고 지나가는 데에도 단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1단계 : 부정(denial)
2단계 : 분노(anger)
3단계 : 타협(bargaining)
4단계 : 우울(depression)
5단계 : 수용(acceptace)
첫 번째 단계에서는 현실을 부정한다. 상실을 의미하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아무 생각도 눈물도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하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필자가 동생을 잃었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를 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충격을 겪을 때 우리의 마음이 본능적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장치인 것 같다.
두 번째 단계로, 상실을 인정하고 나면 화가 난다.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왜 하필 나와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노한다. 자기 자신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조차 화를 낸다.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슬픔과 상실의 책임을 지우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세 번째 단계는 타협이다. 분노가 잦아들면 상실을 최대한 늦추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최대한 희망을 붙잡으려고 한다. 이런 건 별것도 아니라고 합리화하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 이번 한 번만 구해주시면 앞으로는 새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굳게 약속한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깊은 우울을 경험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 매일의 상실감이 비로소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게 된다. 매사가 허무하고 무기력해진다. 떠나간 사람을, 지나간 영광을, 스러진 청춘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울게 된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후에 거의 반년 동안 계속 꿈속에서 통곡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소중한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충분히 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의 무게는 참으로 무겁다.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많은 꽃을 받게 되는 이유는 인간에게 감사보다 후회가 더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 후회와 슬픔과 죄책감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상실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우리는 그 이별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상실이 우리 삶의 일부이며,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는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에게 마음의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떠나는 사람은 삶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는 기회가 되고, 보내는 사람은 남겨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새로운 시작
이별과 상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다. 하나의 관계가 끝났음을 받아들일 때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열리고, 결혼이 끝났음을 받아들일 때 혼자 사는 삶을 배우고 준비하게 된다. 젊음이 시들어 가는 것을 받아들일 때 아름답게 나이드는 법을 고민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남은 자가 살아내야 하는 삶을 비장하게 마주하게 된다. 상실의 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에게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하나의 잔치를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짜 집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행복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천국의 메세지는 상실이 그저 끝이 아님을 알려준다. 장례식은 남겨진 이들에게는 작별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새롭게 출발하는 이를 환송하는 기쁨과 축하의 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상실의 마지막에는 반전이 있다. 거기서부터 한층 더 성숙한 삶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