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때문에 피난
집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뉴스를 지켜보며 피난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결국 저희 동네는 대피령까지는 내려지지 않았어요. 해안가에 위치한 동네들만 부분적으로 대피령이 내려졌는데, 일단 이 동네는 바람만 좀 심하게 불거나 비가 많이 내리면 정전이 되는지라 아이들과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피난겸 휴가겸 해서 떠나기로 했어요. 사실, 정전 대비를 하나도 못했거든요. 아는 언니가 정전되기 전에 랜턴이라도 사다 놓으라고 했는데, 허리케인 온다는 소리에 랜턴을 사러 갔더니 랜턴은커녕 후레쉬도 동이 나버린 상황. 그래서 떠나야만 했죠.
가기 전에 혹시 모를 침수에 대비해 중요 서류와 사진은 높은 곳에 올려두고, 귀중품은… 없으니 됐고! 4살짜리 큰아들 와플이에게 허리케인을 피해서 애틀랜타로 가야 하니 짐을 싸라고 여행가방을 주었더니, 여행가방을 장난감으로 가득 채울 기세. 그 사이 엄마인 저도 여행가방을 쌌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애들은 굶기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모든 호텔이 만실
떠나기로 결정은 했지만 도로 정체가 무서워서 막상 출발은 못하고 계속 교통 상황만 지켜보다가, 정체가 심하면 중간 지점의 호텔에서 잠시 묵었다 갈 생각으로 호텔 검색을 해 보았더니 모든 호텔이 전부 다 만실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플로리다는 이틀 전에 대피령이 내려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쪽 내륙으로 올라왔고, 조지아도 일부 대피령이 내려졌고, 제가 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역시 대피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미리 호텔을 예약해 두고 떠날 준비를 한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작년에 허리케인 매튜를 피해서 애틀랜타로 갔을 때 4시간 거리가 9시간이 걸렸기에 도저히 도로에서 그렇게 오래 버틸 자신이 없었어요. 저야 참을 수 있지만, 15개월짜리 제제와 4살짜리 와플이에게는 너무 힘든 시간일 테니까요. 그래서 밤을 꼴딱 새고, 새벽 4시에 출발! 다행히 전혀 정체 없이 5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피난 가서 만난 허리케인
그.런.데. 알고보니 목적지에 또 다른 분이 도착 예정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허리케인 어마!!!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어마가 진로를 바꿔 내륙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기껏 피해서 애틀란타로 온 것이 허리케인을 마중나온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아는 언니집에서 허리케인 어마를 맞이하게 되었고, 아침부터 세찬 바람과 비를 뿌리더니 결국 그날 오후 아이들과 영화를 보던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되어 버렸어요. 불이 없으니 촛불을 켜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양푼에 나물 넣고 양푼이 비빔밥을 나눠 먹고 새벽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행히 언니네 집은 정전 외에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다음날 집 근처의 도로에 나가 보니 곳곳에 나무들이 쓰러져 있더라고요.
허리케인 어마는 영향권이 워낙 커서 5시간 떨어진 저희집 동네에도 많은 비를 뿌렸는데, 해안가인 힐튼헤드 아일랜드 지역은 역시나 침수가 발생했어요. 길가의 레스토랑은 거의 지붕까지 잠겼고, 저희 동네로 진입하는 도로도 침수되어서 도로가 통제됐어요. 그래서 예정보다 하루 더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오는 길이 막힐까 걱정되어서 고속도로가 아닌 로컬 도로로 둘러 왔는데, 오다 보니 중간중간에 나무가 쓰러지거나 침수 때문에 도로가 막힌 곳이 있어서 정말 빙글빙글 돌아서 겨우 집에 도착했어요.
텅텅 빈 마트 진열대
집에 와서 이틀 정도 쉬고 애들 먹일 우유와 계란이 필요해서 월마트에 갔더니, 세상에나! 진열대 테러당한 줄 알았어요. 그 넓고 많은 진열대에 계란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치즈, 햄 코너도 전멸, 주스도 거의 없고, 냉장 도우 코너도, 햄버거 패티 만들 쇠고기도 텅텅~, 필요한 건 다 없더라고요. ㅠ.ㅠ
그 상황에서도 한 가지 배운 건 미국인들의 재난 대비 식품이에요. 빵, 햄, 치즈가 그들의 재난 대비 식품이더군요. 그리고 한 가지 예상 외의 품목은 바로 칩스! 보관이 간편한 포테이토칩이나 또띠아칩 종류가 텅텅 비는 것은 좀 의외였어요.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사우스 캐롤라이나 블러프턴에 거주하는 두 아이의 엄마. 미국 생활정보, 일상,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