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호박씨 까는 나나양
저도 수요일에 휴무 받아서 스탁 업무 좀 피하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요일에 휴무를 받은 적이 없어서 불만인 차에 나나양이 잔꾀만 부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은 못 참겠더라고요. 그리고 나나양은 다른 상사들과 있을 때는 일하는 ‘척’이라도 하는데, 저랑 있을 때는 대놓고 일을 안 하는 거예요. 저를 상사로 인정하기 싫다는 거였죠.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어느 수요일, 라라양과 제가 매장 스탁 업무를 거의 끝내고 바구니가 몇 개 남지 않았을 때 나나양이 오후 출근을 했습니다. 라라양이 퇴근하면서 저에게 매장 스탁 업무와 창고 스탁 업무를 끝내 달라고 했고, 매장 밖에서 나나양에게도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매장 밖이라고 해도 실내이고 오픈된 공간이라 대화 내용이 다 들렸죠. 라라양이 퇴근한 후 제가 나나양에게 말했습니다.
“남은 바구니 좀 정리해 줄래?”
“라라가 나보고 창고 스탁 업무 먼저 하라고 했어.”
“매장 스탁이 우선이니까 매장부터 먼저 끝내고 창고 스탁하면 돼.”
“아니야, 매장 밖에서 얘기해서 네가 못 들었나본데, 라라가 분명히 나한테 창고 스탁 하라고 했어.”
저는 슬슬 열을 받기 시작했죠. 매장 스탁은 앉았다 일어났다, 열쇠 열고 닫고 해야 하니 귀찮고 힘들어서 하기 싫은 거였어요. 반면, 창고 스탁은 아무 방해 없이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설사 라라양이 창고 스탁 업무를 하라고 지시를 했더라도 그녀가 퇴근을 했으니 나나양은 제 지시를 따르는 게 맞는 거고요. 그래서 제가 다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오케이. 라라가 너에게 창고 스탁을 맡겼다면 창고 스탁은 니가 해. 하지만 매장 스탁 먼저 끝내고 해. 매장 스탁이 우선이니까.”
그러자 나나양이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하며 한 발 물러서더군요.
“난 아무거나 해도 괜찮아. 라라가 나한테 창고 스탁 먼저 하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을 해서 그런 거야. 매장 스탁부터 할게.”
그리고 저는 바로 휴식 시간이어서 휴게실로 와서 라라양에게 확인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랬더니 이런 답장이 왔습니다.
“나는 매장 스탁이랑 창고 스탁을 끝내 달라고 했어. 그러면 당연히 매장 스탁을 먼저 끝내고 창고 스탁을 해야지. 그리고 네가 상사니까 나나는 네 말에 따라야지.”
유치하지만, 제가 라라양에게 이렇게 확인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나나양이 뒤에서 열심히 호박씨를 까고 있었거든요. 뺀질거리다가 매니저에게 미운털이 박혀 버린 나나양이 최근 라라양으로 노선을 갈아탔어요. 라라양이 차기 매니저가 될 사람이니 라라양에게 ‘샤바샤바’ 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갈 심산이었겠죠. 그래서 그 즈음 나나양이 라라양에게 시시때때로 문자 메시지와 페이스톡을 하며 매장에서 일어난 일과 자기가 매장에서 한 일 등을 매일 보고하고 있었더라고요. 남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으면서 자기가 했다고 말하거나, 자기 일을 신입 직원에게 시키고는 자기가 했다며 ‘가로채기’를 시전하면서요.
저는 다른 직원들과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않아서 나나양과 라라양이 그렇게 가까운 줄 까맣게 모르다가 나중에 나나양이 매장의 모든 일을 라라양에게 시시콜콜 보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래서 나나양과 부딪치는 일이 있을 때는 저도 라라양에게 메시지를 해서 전후 맥락을 알리고 객관적 증거를 남겨야 했어요. 그래야 나나양의 시점과 제 시점에서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제가 끝낸 일들을 라라양에게 사진으로 보내기 시작했어요. ‘이거 내가 했어’라고 말하지 않으면 나나양이 자기가 했다고 보고해 버린다는 걸 라라양과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됐거든요.
매니저의 덫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해서 라라양과 대화를 해보았습니다.
“나 불평할 게 있는데 좀 해도 돼?”
“당연하지! 뭔데?”
제가 나나양의 근무 태도에 대해 한마디를 꺼내자마자 라라양은 저보다 더 맺힌 게 많았는지 쉬지도 않고 나나양에 대한 불만을 줄줄이 쏟아내더라고요. 그리고 둘이서 내린 결론은 ‘이대로는 안 된다! 이건 매니저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였고, 잠시 후에 매니저에게 면담 요청을 했습니다.
저와 라라양은 각자 느껴왔던 나나양의 근무 태만에 대해 보고를 했어요. 매니저가 그동안 다른 매장의 오픈 준비를 돕느라 나나양의 상황을 지켜볼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어쨌거나 매니저에게 보고를 했으니 뭔가 달라지겠거니 했으나 나나양은 여전히 해맑게 일을 안 했고, 저는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결국 발목에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입사 후 처음으로 병가를 내려고 콜스 백화점 수퍼바이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그동안 저는 아파도 꼭 출근해서 저 대신 일할 사람이 구해지면 조퇴를 하는 식이었어요.
“저 발목이 너무 아파서 걷기가 힘들어 오늘은 일을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직원들에게는 세상 쿨하게 병가를 허락해주던 수퍼바이저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네가 안 오면 누가 일하지? 그럼 너 대신 일할 사람을 찾아봐.”
“저 대신 일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알았지? 이따가 보는 거야, 오케이?”
아니, 저 대신 일할 사람을 찾는건 수퍼바이저가 할 일이죠! 게다가 아파서 일을 못 가겠다는 사람한테 막무가내로 이따가 보자는 건 그냥 나오라는 말이잖아요. 너무 열이 받는 겁니다. 같이 병원에 가려고 하루 휴가를 낸 남편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더 화를 냈어요. 결국 발목 지지 부츠인 워킹 부츠를 신은 사진을 찍어 보내고 나서야 병가를 허락 받았어요. 그리고 저도 이쯤되니 열 받아서 의사가 쉬라고 했다며 3일간 병가를 내버렸어요. 그 덕에 수요일 스탁 업무도 한번 피해볼 심산이었죠.
그렇게 월화수 3일을 쉬고, 목요일에 출근을 했더니, 세상에나 ……. 수요일에 다 끝났어야 할 스탁 업무가 목요일에도 여전히 한가득 쌓여 있지 뭡니까!!!
‘지금 나 일 시키려고 이렇게 미뤄둔 건가? 아니면, 내가 없어서 이걸 다 못 끝낸 건가?’ 정말 너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잘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워킹 부츠를 신고 출근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하필 그날 같이 일하게 된 사람이 또 나나양!!!
저는 걸어 다닐 수가 없으니 바구니에 담긴 제품들을 브랜드별로 스탁하기 쉽게 분류 작업을 했는데, 바구니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매니저가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고 나가자 나나양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 놓더니 또 머리에 트리트먼트를 바르고, 손님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거죠. 하아~~~
아, 진짜 오늘은 다 때려치고 싶다!!! 그런데 때려칠 때 때려치더라도 오늘 이 스탁 업무는 내가 전부 다 끝내고 간다!!! 성격이 팔자라고 저는 결국 속으로 오만 욕을 하면서 발을 절뚝거리며 바구니를 들고 여기저기 스탁을 하러 다녔습니다. 서랍에 스탁할 때는 워킹 부츠 때문에 쪼그려 앉을 수가 없어서 최대한 허리를 구부려 스탁하느라 허리가 뽀사지는 줄 알았어요. 제가 그렇게 절름발이로 스탁을 하면서 바구니를 서너 개 없애는 동안, 점심 시간 내내 바구니 하나도 끝내지 못하고 있는나나양…
저는 매니저가 점심식사 후 돌아오면 오늘 만큼은 사단을 내야겠다 결심했어요. 그리고 잠시 후 매니저가 돌아왔습니다.
“식사하러 가신 동안 나나양이 스탁 업무를 전혀 하지 않…”
“알아. 실은 영상실에서 나나양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리고 매니저는 나나양을 데리고 사라지셨죠. 얼마 후 나타난 나나양은 기가 푹 죽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말 많던 나나양이 한마디도 안 하더라고요. 다음 날 출근길에 보니 나나양이 휴식 시간인지 매장 밖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좀 불쌍해 보였어요. 그걸 보니 또 마음이 안 좋아서 일할 때 말을 걸었는데, 평소의 나나양 답지 않게 말수도 적고, 그렇다고 저에게 화 난 것 같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수시로 저에게, “내가 할 일이 있으면 알려줘. 뭐 할까? 도와줄 일 없어?”라고 묻더라고요.
그렇게 나나양은 사회생활의 쓴 맛을 조금 본 듯했고, 그로 인해 한 뼘 정도 성장을 하나 싶었지만… 본래 성격이 어디 가나요? ㅋㅋㅋ
너 매니저 생각 있니?
이런 고생 끝에 좋은 일도 있었답니다.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했는데 직원 휴게실에 뭐가 붙어 있더라고요. 이게 뭐지? 응? 내 이름이 있네? 이달의 사원??? 오 마이 갓!!! 제가 세포라의 ‘이달의 사원’으로 선정된 거였어요! 미 전역의 세포라@ 콜스 매장의 세포라 직원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명씩 우수사원을 선정하는데, 세포라 오픈 이래 저희 매장에서 선정된 사람은 가가양 한 명뿐이었어요. 그런데 저희 매장에서 또 한 명의 우수사원이 선정되었고, 그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오피스로 들어가니 부매니저가 격하게 저를 반겨주며, “엘리, 그거 봤어? 너 이달의 사원에 선정된 거??? 너무너무 축하해!!! 너무 기뻐!!!!!” 하며 안아 주더라고요.
그동안 유령 취급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버텨냈더니 승진도 하게 되고, 이런 거에도 뽑히게 되니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해 나름 보상 받는 느낌이었어요. 콜스 매니저가 저희 세포라 매장에도 이걸 붙여 주더라고요. 한국 아줌마가 미국 세포라 매장에 이름이 걸리다니!!!! 이것은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ㅎㅎㅎ
그래서 저는 리드 포지션이자 세포라 우수사원으로서 밥값에 이름값까지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답니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더 편하게 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모든 선반의 서랍에 정리 시스템을 만들고, 스탁룸에도 시스템을 만들고, 그래서 매장에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러던 어느 일요일. 그날은 오전 출근이었는데 스탁룸에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쌓여 있어서 제가 정리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매장 선반을 청소하고 있는데 매니저가 출근하더니 저에게 스탁룸 정리를 했냐고 묻더라고요. 그렇다고 했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저에게 물었어요.
“너 위로 올라갈 생각 있어?”
“위요? 저기 △△ 지점이요?”
그러자 매니저가 피식 웃으며,
“매니저 될 생각 있냐고!”
앗??? 매니저라… 솔직히 말하면 저는 매니저 하고 싶은 생각은 1도 없었습니다. 세포라 매니저가 하는 일을 대충 아는데, 저는 경력도 자질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매니저로서 각종 회의에 가서 발표하고, 윗 사람들이 방문할 때마다 응대하는 등의 스킬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저는 즈~언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매니저가 직접 저에게 매니저 생각 있냐고 물으니 ‘어? 우리 매니저 눈에는 내가 매니저감으로 보이는 건가?, 나도 자격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그리고 번뜩 나나양 생각이 스치더군요. 나를 자기 발 밑으로 생각하던 나나양에게 다시 한번 저의 위치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에, “아직 배울 것이 많지만,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도전해 보고 싶어요.”라고 해버렸습니다. ㅎㅎㅎ
그랬더니 매니저가,
“콜스 매니저가 스탁룸 정리하려고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대. 그래서 네가 정리했나보다 했는데, 나와서 보니까 어느 새 또 청소를 하고 있더라며, 너는 정말 바쁜 꿀벌 같대. 너야말로 매니저가 될 자격이 있어. 신입 매니저들 교육 끝나는대로 너 매니저 트레이닝 시켜줄게.”
이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고,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걱정은… 나나양…이 아니라 라라양이었습니다. 저희 매니저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차기 매니저가 될 사람이 라라양이거든요. 그런데 저에게 매니저 트레이닝을 시키겠다는 것은 라라양이 아닌 저를 저희 매장 매니저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건지, 아니면 저를 다른 매장의 매니저로 트레이닝을 시키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라라양 입장에선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가 매니저 트레이닝을 받는다면 기분 나쁘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라라양과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건 원하지 않았거든요.
매니저가 어떤 식으로 라라양과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해 버렸으니 ‘나중에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어떻게든 해보면 되겠지, 뭐’ 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중요한건, 그동안 전혀 존재감이 없었던 산소 같은 여자에서 이제는 매니저를 넘볼 수 있을 만큼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거니까요.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미국 생활 정보, 일상생활, 문화 차이 등을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이자 <엘리네 미국 유아식>, <엘리네 미국집> 책의 저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