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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한국인] 노르웨이 라면왕 Mr. Lee 이철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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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한국인] 노르웨이 라면왕 Mr. Lee 이철호씨
노르웨이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라면왕 이철호 씨의 모습 ©greened.kr
이준길 변호사 (NC)
법학박사 (SJD)

전쟁고아에서 난민으로
노르웨이에는 2명의 왕이 있다고 한다. 한 명은 노르웨이 국왕이고, 다른 한 명은 라면왕 이철호 씨다. 노르웨이 라면의 대명사가 된 Mr. Lee 라면은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하며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인간 승리와 성공의 상징이 되었다.
이철호 씨는 1937년 충남 천안의 평범한 농사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3살 때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부모와 헤어져 전쟁고아가 되었다. 전쟁통에 구두닦이, 밀짚모자 판매, 냉차 판매를 하며 매일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폭격으로 인한 파편이 온몸에 박혀 야전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시체실로 보내졌다.
당시 한국에 의료봉사자로 와 있던 노르웨이 의사 파우스 박사가 다음날 시체실에 확인을 하러 갔는데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기적처럼 살아 있었던 것이다. 파우스 박사는 어린 소년을 불쌍히 여겨 어떻게든 치료해 살려보려고 그를 노르웨이로 데려갔다. 그렇게 이철호 씨는 1954년에 노르웨이에 정착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배가 고파 요리사가 되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그는 43번의 수술을 받으며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다리에 큰 장애가 남았다. 17살의 나이에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신체장애를 가진 난민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노르웨이에 구두닦이가 없는 것을 본 그는 여기서 구두닦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병원 침대에 누워 부지런히 노르웨이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두닦이도 학교를 다녀서 면허시험을 봐야 영업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면허시험에 낙방하고 말았다. 참 억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배가 고팠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을 곳을 찾아 호텔 식당 청소부로 들어갔다. 항상 배가 고팠던 그는 요리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 본 주방장이 요리학교에 갈 기회를 주었고, 요리전문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장학금을 받아 스위스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위스에서 요리사로 인정받아 노르웨이의 호텔에 최고의 조건으로 스카웃되었다.

운명을 바꾼 한국 출장
1968년, 요리사로 나름 유명세를 떨치던 그는 한국전쟁 중에 한국에 설립된 스칸디나비아 클럽에 가서 6개월간 요리를 가르쳐주고 오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을지 6가의 뒷골목에서 처음으로 라면을 먹어보게 되었다. 너무 맛이 있고 입에 짝짝 붙었다. 그는 이 맛을 유럽에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면 3박스를 가지고 노르웨이의 식품회사들을 돌아다니며 마케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라면이 맵고 얼큰해 노르웨이 사람들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노르웨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스를 가지고 한국의 라면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노르웨이인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라면 수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사진이 들어간 Mr. Lee 라면이 출시되자 가게마다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그는 백화점에서 직접 시식회를 열고, TV 광고에도 출연해 한국식 명언을 이야기하며 광고를 했다.

한국을 사랑한 사람
그는 특히 Mr. Lee 라면 포장지에 한글로 ‘김치맛, 소고기맛, 닭고기맛, 불고기맛’이라고 표기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52세에 시작한 라면 사업은 20년 이상 승승장구해 그에게 ‘노르웨이 라면왕’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고, 이민자 최초로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위대한 노르웨이인 훈장’과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노르웨이 교과서와 인명백과사전에도 등록되었다.
사업 규모가 커지자 노르웨이 최대 식품회사에서 Mr. Lee 브랜드를 사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Mr. Lee 라면이 영원히 남기를 바라며 두 가지 조건을 걸고 회사를 넘겼다. 원료는 한국에서만 수입하고, 포장지에 한글 표기를 계속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즐겁게 일하다 보면 돈은 저절로 벌게 되고,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그대로 실천했다. 가장 힘든 조건에서 홀로 성공을 일군 그의 삶이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