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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한인] 미 해군 최초의 여성 장교 ‘안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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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한인] 미 해군 최초의 여성 장교 ‘안수산’
해군 장교로 근무하던 당시 안수산 여사의 모습 ©susanahncuddy.com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
안수산(Susan Ahn Cuddy)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미국 LA에서 3남2녀 중 셋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1902년 결혼 후 미국으로 유학을 온 최초의 한국인들이었는데,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결성해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안수산은 이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한국의 독립을 최우선 가치로 둔 집안에서 성장했고, 청소년 시절부터 신한민보와 흥사단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0대 시절 안수산은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야구와 필드하키 등 스포츠를 즐기는 학생이었으며, LA 시티칼리지에서 대학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자 야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에 진학해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안수산은 미국에 대한 애국심과 반일감정을 바탕으로 미 해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미 해군 최초의 여성 포병 장교
그녀가 미 해군에 처음 지원했을 때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탈락했지만, 그녀는 수차례 다시 지원을 해 결국 입대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입대를 하려는 동기를 묻자 “일본에 맞서 싸웠던 아버지의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1942년 미 해군 예비역 장교 교육 학교(United States Naval Reserve Midshipment’s School)에 입학해 수료 후 미 해군 소위로 임관한 안수산은 미 해군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포병 장교가 되었다. 그녀는 1943년 미 해군 비행 시뮬레이터의 모의비행 교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해 항공기총 사수들에게 항공기 후방석 시뮬레이터에서 적의 비행기를 격추하는 각도분석 방법을 교육하는 훈련교관으로 근무했다.
당시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 내에 반 아시아 정서가 높았고, 군 내에서도 여성이 소수이던 시절이라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 매우 심했다. 그래서 그녀가 해군 장교로 임명된 후에도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6개월간 암호해독 업무에서 배제되었으나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암호해독가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녀가 군복을 입은 장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장소나 대중교통 등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을 분리하는 ‘짐 크로우 법’에 따라 출근 버스에서 뒷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그리고 한 백인 남성 파일럿이 동양인 여성 장교인 안수산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항의하여 그를 따로 교육한 일도 있었다.
안수산이 대위가 된 뒤에는 미 해군 정보국과 미 의회 도서관에서 일했다. 그리고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안수산은 해군을 제대한 후 워싱턴 D.C.에 있는 국가안보국(NSA)에 들어가 암호를 해독하는 비밀정보 분석요원으로 활동했다. 냉전 기간 동안 안수산은 대 소련 섹터의 300명 이상의 언어학자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싱크탱크를 지휘하는 책임자로 일했으며 국방에 관한 많은 일급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녀가 국가안보국에서 일할 때 아일랜드계 고급 하사관이자 암호 해독가인 프랜시스 커디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당시 그녀가 거주하던 버지니아주에는 ‘인종간 결혼 금지법’이 존재해서 결혼 당시 안수산과 커디 부부는 법적으로 결혼 허가조차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언
안수산이 11살이던 1926년 그녀의 아버지는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떠나던 날 아버지는 안수산에게 이런 말씀을 남겼다.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Be a god American citizen, but don’t forget your heritage.)”
이 말은 안수산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로 자리잡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바로 평생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안수산은 국가안보국 은퇴 후 LA로 이주해 안창호의 흥사단 활동시기부터 내려오던 각종 기록물을 잘 보존해 1983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평생에 걸친 그녀의 공로 덕분에 2003년 캘리포니아 28구역 주 의회에서 그녀를 ‘올해의 여성’으로 지명하였고, 2006년에는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 센터에서 수여하는 ‘미국인 용기상(American Courage Award)’를 수상하였다.
2018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 문화유산의 달’ 지정 선포문에서 “미국에 이민 온 최초의 한국인 부부의 딸인 안수산은 가장 큰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도 강한 직업윤리, 불굴의 애국심, 소명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으로 미국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2020년 미국 국무부가 운영하는 ‘셰어 아메리카’에서도 안수산을 ‘선구자, 용감한 장교, 공동체 지도자, 한국계 미국인인 안수산 여사는 미국의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2003년 연세대학교에 초청강사로 연단에 선 안수산은 영어로 강연을 했다. 그리고 강연을 마친 후 동행했던 아들 필립 안 커디가 강연의 통역을 담당했던 교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께서 미국에서 오래 사셔서 한국말을 잘 못하십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에게 어머니께서 꼭 한국말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잠시만 들어주십시오.”
이윽고 다시 부축을 받으며 나온 안수산은 느린 한국말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나라가 없어서,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라가 있으니,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안수산은 2015년 6월 24일 향년 100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노스릿지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타계하기 하루 전인 6월 23일에 안수산은 공식 석상에서 한인 2세들에게 마지막 강연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너희는 다만 성공적인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라.”
그녀가 타계하기 3개월 전인 2015년 3월 10일, LA카운티는 이날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였고, 2016년 타임지는 그녀를 ‘이름없는 여성 영웅’에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