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건너편(2017)
(The Other Side of Hope)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주연: 셰르완 하이,
사카리 쿠오스마넨
1982년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소설 <죄와 벌>을 직관적으로 해석한 작품을 시작으로,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소외계층을 주인공으로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35년간 끈질기고도 진심어린 영화를 만들어 온 핀란드 출신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신작 ‘희망의 건너편(2017)’은 전작 ‘르 아브르(2011)’에 이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 위기를 주제로 한 영화이다.
영화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석탄 화물선에 숨어 핀란드로 망명한 칼레드와 알콜 중독자 아내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비크스트롬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시작된다.
시리아 정비공 칼레드
알레포 변두리에 살던 시리아 정비공 칼레드는 누가 쏜 것인지도 모르는 미사일 폭격으로 점심을 먹던 그의 일가족이 모두 폭사한다.
빵을 사러 갔다가 운 좋게 살아남은 칼레드와 여동생 미리암은 걸어서 터키 국경을 넘은 후 배를 타고 그리스로 밀입국했다가 마케도니아를 거쳐 다시 걸어서 세르비아 국경을 넘는다. 그런데 헝가리 국경 근처의 난리통에 동생을 잃어버리고, 동생을 찾아 난민 수용소를 헤매던 칼레드는 네오 나치족의 공격을 피해 핀란드행 석탄 화물선에 숨었다가 얼떨결에 핀란드까지 오게 된다.
이제 막 헬싱키 항구에 도착한, 석탄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칼레드의 모습은 이방인을 넘어 외계인마저 연상시킨다. 배에서 빠져나온 그는 정식 망명을 신청하려고 경찰서로 향한다.
셔츠 도매상 비크스트롬
셔츠 도매상을 하는 평범한 중년 남자 비크스트롬은 알콜중독자 아내 앞에 결혼반지와 집 열쇠를 내려놓고 집을 나온다. 아내는 비크스트롬이 두고 간 결혼반지를 재털이에 던지고 다시 술을 마신다.
비크스트롬은 이제 막 불행한 결혼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삶으로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차를 몰고 나간 비크스트롬과 항구를 빠져나온 칼레드는 길거리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때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밴드 음악은 이 두 주인공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보다는 내일에 대한 불안과 비장함을 느끼게 한다.
불필요한 설명 없이 조용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 오프닝 장면은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간결하게 잘 전달해준다.
기각된 망명 신청
칼레드가 길거리 밴드의 음악을 듣고 동전을 주자 뮤지션은 석탄을 뒤집어 쓴 그에게 기차역을 가리키며 “샤워, 저 밑에 가면”이라고 최소한의 단어로 칼레드에게 가장 필요해 보이는 것을 알려준다.
칼레드는 기차역 밑에 있는 유료 샤워장에 가서 깨끗이 씻은 후,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준법시민답게 경찰본부에 가서 정중하게 망명 요청을 한다.
난민 심사 면접관이 칼레드에게 묻는다. “그 많은 국경을 어떻게 통과한 거죠?”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난민은 어디서나 골칫거리로 여겼기 때문에 모두들 난민을 못 본 척했어요. 그래서 국경을 넘기가 쉬웠어요.” 인권과 평등이 보장된 유럽에서조차 난민들이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감독은 담담하게 묘사한다.
결국 시리아 사태의 심각성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모른 척하는 관료들에 의해 칼레드의 망명은 기각된다. 그때 TV에서 시리아 알레포의 아동병원이 폭격을 당해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외신이 흘러 나온다. 그 뉴스를 시리아 난민들이 아무 표정 없이 보고 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이 끔찍한 현실을 보고도 무관심하고 냉담한 당국의 태도에 이제는 분노도 저항도 모두 포기한 그저 자포자기한 얼굴이다.
만연한 극우주의
망명 신청이 기각된 칼레드는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결국 불법체류를 결심하고 본국으로 송환되기 전날 난민센터를 탈출한다.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거리 밴드의 공연을 보게 된 칼레드. 그런데 앞에서 보면 평범해 보이는 관객들의 얼굴과 달리, 뒷모습을 보니 등에 모두 같은 글씨가 씌여 있는 자켓을 입고 있다. 그건 바로 ‘핀란드 해방군’. 감독의 블랙 유머를 보여줌과 동시에 칼레드가 이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칼레드를 발견한 극우주의자들은 칼레드를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르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부랑자들이 들고 있던 술병과 지팡이로 그들을 물리쳐준다. 역시 카우리스마키 감독다운 설정이다.
현실에 눈 감은 사람들
한편, 비크스트롬은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식당을 차리기 위해 셔츠 도매업을 팔아 종자돈을 마련한 다음 도박판에 뛰어든다. 운 좋게 돈을 딴 그는 중개업자에게 속아 종업원 3명이 딸린 망하기 직전의 식당 ‘골든 파인트(황금 맥주잔)’를 인수하게 된다.
거미줄 쳐진 부엌 구석에서 졸고 있는 주방장, 식당 문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얼결에 손님을 받는 호스트, 급료가 얼마인지 정하지도 않고 일을 하는 견습 웨이트리스, 그리고 재료창고에서 이들이 키우는 개 한 마리가 살고 있는 ‘골든 파인트’ 식당은 메뉴도 절인 정어리와 미트볼밖에 없다. 이 허술한 식당에서 감독이 무엇을 이끌어낼지 자못 흥미가 돋는 설정이다.
어느 날 아침 비크스트롬은 식당 쓰레기장에서 자고 있던 칼레드를 발견하고는 티격태격하다가 마침내 그를 데려와 음식을 내주며 식당의 식구가 될 것을 제안한다.
이때 비크스트롬의 행동은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정도로 표현된다. 마치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반문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영화의 최고의 코메디는 고추냉이를 한 숟갈 듬뿍 올린, 기름에 절인 정어리로 만든 초밥이다. 미트볼과 절인 정어리를 벗어나지 않는 골든 파인트의 메뉴로는 매출이 늘지 않자 비크스트롬과 직원들은 회의 끝에 요즘 트랜드라는 초밥집으로 업종을 바꾸기로 하고 급하게 ‘임페리얼 초밥’라는 일본 식당으로 간판을 바꾼다.
어느 날 일본 단체 손님들이 초밥을 주문하는데 신선한 생선이 떨어지자 겨울에 먹으려고 소금에 절여 놓은 정어리를 쓰기로 한다. 주방장이 “너무 짜지 않을까요?”라고 묻자, 사장은 “고추냉이가 매우니까 괜찮을 거야.”라고 대답한다. 정말 괜찮았을까? 그들은 결국 초밥집을 접고 다시 ‘골든 파인트’로 돌아오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폭소를 자아냄과 동시에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칼레드와 같은 정치적 난민 문제를 무시한 채 새로운 소비 트렌드에만 관심을 쏟는 오늘날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풍자를 절인 정어리 초밥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희망의 건너편
비크스트롬의 도움으로 칼레드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동생을 찾게 된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자기처럼 위조 신분증을 만들자고 권했으나 여동생은 자신의 정체성을 속일 수 없다며 합법적인 망명절차를 밟겠다고 한다.
다음날 경찰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돌아가던 길에 칼레드는 네오 나치의 스킨헤드족에게 습격을 당해 칼에 깊이 찔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날 동생과의 약속을 지켜낸다. 그리고 호숫가의 나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칼레드는 미소를 짓는다. 그가 건너지 못한 희망의 건너편에서 여동생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헬싱키의 회색빛 삭막함과 달리 ‘골든 파인트’ 안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다. 초라해 보이지만 유쾌한 이 곳에서는 난민이라는 편견으로 사람을 규정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보살핀다. 감독이 원하는 세상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늘 절제와 냉소로 관객들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은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희망의 건너편’의 피날레에서 절망도 희망도 아닌, 우리가 생각하는 희망의 건너편을 찾아가라는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롱샷은 희극이요, 클로즈업은 비극”이라던 찰리 채플린의 말을 뒤집어, “우리의 삶은 비극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듯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절망 앞에서 스스로를 구해낼 수 없는 사람들의 편에 지금처럼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늘 함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