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 &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
감독: 드니 뵐뇌브
주연: 라이언 고슬링, 자레드 레토
재조명된 걸작
필립 K.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1968)』를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철학적인 주제로 문화 비평가나 인문 지식인들 사이에 호평을 받으며 10년 후 디렉터스 컷을 다시 상영하는 등 작품에 대해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특히 이 영화는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투영한 ‘사이버 펑크’라는 새로운 장르의 효시로서 ‘매트릭스’, ‘공각기동대’ 등 이후 SF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로부터 35년 후인 2017년, 드니 뵐뇌브 감독에 의해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제작되었다. 전편의 설정과 주제의식을 잘 계승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하지만, 그동안의 놀라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레이 커즈와일이 말한 기술의 특이점(인간을 넘어선 초인공지능의 출현 시기)에 가까워진 만큼, 이 영화 속의 인공지능은 말할 것도 없고 복제인간도 더 이상 공상세계에만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편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2019년 전쟁과 오염으로 황폐된 지구에서 인간들은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시작하는데, 이때 새로운 행성에 필요한 노예 노동자, 군인, 매춘부 등으로 이용될 복제인간(책에서는 인간 형상의 로봇 ‘안드로이드’, 영화에서는 ‘레플리컨트’라고 불린다.) ‘넥서스 6’를 대량 생산하게 된다. 이 레플리컨트를 제작하는 회사 타이렐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을 모토로 인간보다 뛰어난 힘과 민첩성, 그리고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진 레플리컨트를 생산하지만, 노예로서의 차별에 반감을 품은 넥서스 6 저항군이 폭동을 일으키자 레플리컨트 제작은 금지된다. 이로 인해 타이렐사는 파산하게되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49년, 웰레스사가 타이렐을 인수한다. 웰레스사는 그들이 가진 기술을 발판으로 우주 식민지 정복의 야욕을 품고 인간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는 ‘넥서스 9’을 만들기 시작한다.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경계
이전에 만들어진 위험한 복제인간 넥서스 6를 폐기(‘은퇴’라는 단어를 쓴다.)하는 일을 하는 ‘블레이드 러너(형사)’인 K는 직장에서 인간들에게 ‘껍데기’라는 조롱과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의 동요가 없는 순종형 넥서스 9이다.
어느 날 K는 농부로 살아가는 레플리컨트 샤퍼를 은퇴시키는 과정에서 의문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유골의 정체가 제왕절개를 하다가 죽은 레플리컨트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레플리컨트는 유전적으로 임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몸에서 잉태되고 태어나면서 영혼을 부여받는 인간의 적통성은 레플리컨트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보장하는 기준이었다.
‘레플리컨트가 만약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껍데기가 아니라, 생식을 통해 태어나는 영혼이 있는 존재라면 우리와 인간 사이에 차이는 무엇인가?’ K는 의문을 품게 된다.
경찰 반장은 이 사건이 알려지면 사회적 대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K에게 그 레플리컨트 아이를 찾아내 죽이고 사건을 덮으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K가 사건을 파헤칠수록 더더욱 혼란스러운 단서들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시절 지니고 있던 목각말에 새겨진 날짜와 동일한 날에 레플리컨트의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그때부터 K는 자신이 바로 그때 태어난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고, 자신의 기억이 심어진 것인지, 진짜 경험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 메모리 메이커인 스텔린 박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K의 눈을 통해 그의 기억을 스캔한 후 눈물을 흘리며 K의 기억은 누군가가 경험한 진짜 기억이라고 말해준다. 그러자 K는 경찰반장에게 레플리컨트 아이를 찾아서 죽였다고 보고하고, 자신의 아버지일 수 있는 전직 블레이드 러너, 데카드를 찾아간다.
그런데 데카드를 쫓던 이들에 의해 데카드는 납치를 당하고, K는 레플리컨트 저항단체에 의해 구조된다. 그리고 거기서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듣게 된다. 그때 태어난 기적의 아이는 여자 아이였고, K는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레플리컨트 저항군들에 의해 복제된 가짜이자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이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난 특별한 아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자아를 쌓아올린 K.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K를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인가 아닌가?
한편 웰레스사는 임신이 가능한 레플리컨트의 생식 기술을 얻으려고 ‘태어난 아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K를 추적하던 중 그와 함께 있던 데카드를 납치해 웰레스사로 데려온다.
블레이드 러너 전편과 속편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데카드가 인간인지 레플리컨트인지의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데카드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 인간의 정체성을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으로 구축된 이성의 주체로서 인간을 규정한 데카르트와, 사고하는 이성을 가졌지만 정체성이 모호한 데카드의 이름이 오버랩되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기존의 실존주의적 인간에 대한 정의를 의심하는 감독의 의도된 설정일까?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블레이드 러너 전편과 속편을 관통하는 화두이다. 속편의 인공지능 홀로그램 ‘조이’ 캐릭터에서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가 다시 한번 제기된다. 조이는 웰레스사가 만든 가상현실 프로그램으로, 인공지능 맞춤형 애인 홀로그램 이미지이다.
바깥 세상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레플리컨트인 K가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조이가 항상 따뜻하게 맞아준다. 조이는 K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민할 때 “넌 특별해. 넌 태어났지.”라고 말해주고, ‘조’라는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육체적 교감을 나눌 수 없는 홀로그램이기 때문에 레플리컨트 창녀의 몸을 빌어 K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심지어 K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소멸될 수도 있는 에메네이터(Emanator)를 부서뜨리라고 말한다.
상업용 홀로그램 제품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탈한 대가로 죽게된 조이가 마지막 순간에 다급하게 K에게 남긴 한마디, “사랑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코드속에 사랑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조이. 그런데 인위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자신을 희생해 K를 지킨 조이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까 아닐까?
엄마의 자궁이 아니라 비닐에서 태어난 레플리컨트 K에게 자신이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불어넣어준 것은 인공지능 홀로그램 조이였다. 그러나 조이가 소멸된 후 K는 길거리에서 “당신이 듣고 싶은 모든 것, 보고 싶은 모든 것이 되어드립니다”라는 웰레스사의 홀로그램 조이의 광고를 보게 된다. 결국 조이는 케이에게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제품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것 뿐이었을까?
발달한 인공지능에게 기계적인 프로그램과 인간적인 자의식이 공존할 수 있다는 면에서 조이의 정체성 또한 여전히 모호하다. 홀로그램이라는 가상의 육체에 인간적인 자의식을 가진 조이, 그녀를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의식을 가진 인공지능
영화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레플리컨트들이 등장한다. 블레이드 러너 전편에서 우주 식민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넥서스 6의 우두머리 로이 베이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동료들을 잃은 로이는 복수에 나서며 데카드를 죽이려 하지만 추락 직전의 데카드를 살려준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며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하는 것들을 보았어. 그 기억들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지겠지, 빗속의 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라고 말하며 죽음을 맞는다.
빗물과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창조주가 정해준 예정된 운명을 맞는 것과, 죽음이 다가올수록 무감각해지는 신경을 깨우려 못으로 손을 찔러 손에는 못이 박힌 상태에서 자신을 핍박한 자를 구원하는 레플리컨트 로이의 모습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마지막 장면은 전편의 오마주다. K는 데카드를 딸 스텔린 박사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고, ‘태어난 기적의 아이’ 스텔린 박사와 자신에게 사랑의 의미를 알려준 아버지 같은 데카드를 지켜내고 복종을 거부한 대가로 죽음을 맞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K의 방에 있던 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창백한 불꽃』에 나오는 시구를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내리는 눈송이를 다시 만져 보라. 흩날리는 눈발은 느리고 모양이 없고 불안정하고 불투명하리라.”
문학과 영상미를 접목시킨 뵐뇌브 감독의 섬세한 감각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오염, 습기, 절망, 군중, 험악함으로 가득 찬 LA의 디스토피아적 설정은 이 영화의 사이버 펑크 감성과 연결된다. 특히 여기저기에 만연한 아시아 코드는 ‘첨단’과 ‘낙후’를 동시에 상징하는데 영화에서 소득이 높은 중산층 이상 사람들은 우주 오프월드로 떠나고 오염된 지구에 남은 계층은 아시아인을 비롯 하층민들로 설정되어 있다.
착취는 문명이 달리는 연료이다. 실제 이민자들의 피와 땀으로 개발된 미국 서부 도시와, 복제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해 건설한 미래의 오프 월드가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의 억측일까? 이 영화에서 레플리컨트들은 인간들에게 묻고 있다. “너희가 가진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너희를 ‘인간’답게 하는가?”
그림자처럼 닮아 있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년)와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현재를 반영한 인류 미래의 몽타주이면서, 그 안에서 우리 스스로 계속 자문해 보아야 할 철학적 질문을 숙제로 남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