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After Life, 1998)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주연: 이우라 아라타, 오다 에리카, 테라지마 스스무, 이세야 유스케
After Life
종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안개에 휩싸인 밝은 빛의 세계로부터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는 이들의 모습은 어렴풋한 실루엣만 보인다.
“상황을 대충 아시겠지만 확인하는 차원에서, 여러분은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그렇다. 이들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었다. 안내인의 설명이 이어진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추억을 딱 하나만 선택해주세요. 여러분이 선택하신 추억은 저희가 영상으로 재현해 드립니다. 그 추억이 여러분께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순간, 여러분은 그 기억만을 가지고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곳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7일간 머무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역 ‘림보’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림보의 직원들과 인터뷰를 하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러면 림보 직원들은 그 추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그들이 선택한 그 영원한 순간 속으로 떠날 수 있게 도와준다.
일본의 거장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새로 사망한 22명의 사람들이 일주일간 림보에 머물며 펼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단순하고 강렬하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가장 행복했던 순간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기억, 비행연습 때 하늘을 날며 보았던 구름, 처음으로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남자와 함께 있었던 호텔, 전쟁 후 헤어졌던 연인을 우연히 만난 다리, 아이를 낳았을 때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던 순간, 대지진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대피한 대나무숲에서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먹던 주먹밥, 전쟁 때 적군이 바나나잎에 퍼준 쌀밥, 어릴 때 빨간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오빠가 귀엽다고 치킨 라이스를 사주던 기억…….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평범한 인터뷰 장면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의 추억에 함께 빠져들게 된다.
이 인터뷰에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캐스팅되어 진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늘 소소하고 작은 것에 귀 기울이는 히로카즈 감독의 ‘사람’에 대한 태도가 녹아 있는 대목이다.
영화 속에는 추억을 골라야 하는 마지막 날까지 결정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두 사람이 나온다. 과거보다는 미래에 더 관심이 많은 20대 청년 이세야,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아온 남자 와타나베.
와타나베의 담당자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일생이 찍힌 비디오 테잎 70개를 갖다주며 이렇게 말한다.
“참고만 하세요, 기록은 기억과는 다르거든요.”
와타나베는 자신의 일생에 대한 기록을 보며 아내 교코에게 평생 무심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영상을 보던 모치즈키의 얼굴이 문득 굳어지며 와타나베에게 묻는다. “행복하셨습니까?”
50년 전 해군장교로 사망한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비디오에서 자신의 약혼녀였던 교코의 모습을 보고 만감이 교차한다. 모치즈키는 교코와 약혼한 상태에서 전쟁에 참전했다가 죽은 것이었다.
한편 와타나베는 결혼 40년만에 처음으로 아내 교코와 함께 극장에 갔던 날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한가한 오후를 선택하고 림보를 떠난다.
와타나베가 떠난 후 모치즈키는와타나베가 남긴 편지를 발견한다.
“아내의 마음에 살아 있는 당신을 질투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그걸 뛰어넘을 만큼 긴 세월을 우리 부부는 함께 살았습니다.”
와타나베는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의 소중함을 모치즈키와 교코의관계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나는 네 행복의 한 부분
한편 모치즈키를 짝사랑하는 조수 시오리는 방황하는 모치즈키를 위해 교코가 사망한 후 선택한 추억이 들어 있는 필름을 찾아온다.
교코가 선택한 추억은 모치즈키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순간이었고, 이를 본 모치즈키는 이제 자신에게게도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깨닫는다. 림보는 추억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모치즈키는 50년만에 비로소 가장 행복한 순간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치즈키는 교코의 추억 속에 담겨 있는 그 벤치를 찾아가 홀로 그곳에 앉아 자기 삶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림보의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림보를 떠난다.
내가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곧 자기 실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이었어.”라는 모치즈키의 깨달음은 그의 인생에 함께 했던 소중한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었고, 모치즈키가 선택한 가장 소중한 추억 또한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림보의 사람들과 함께 한 날들이었다.
기억의 재구성
타임벨이 울리며 안내 방송이 나오고, 학예회 준비를 하듯 합주를 하기도 하는 림보의 공간 설정은 감상적이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는 내세에 대한 감독의 비전인 듯하다. 그에게 ‘죽음’이란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도구였다.
또한 사람의 기억은 여러 가지 감정에 의해 편집되고 미화된다. 와타나베의 일생을 기록한 비디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마지막 영화를 만든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실 여부와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을 왜곡하더라도 그 사람이 진짜 갈망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 히로카즈 감독의 의지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시오리가 새로운 망자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고, 카메라는 빈 의자를 정면으로 비춘다. 그러면 그 의자의 새 주인공이 된 우리 각자는 영원으로 가지고 갈 단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고르기 위해 가만히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지?’
지나간 삶을 반추할 때 우리는 그리움을 느낀다. 실체 없는 그리움과 회귀본능을 늘 안고 사는 우리 인간에게는 그 그리운 것과 다시 한번 마주하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삶이 이어진다. 어쩌면 그 기다림이 곧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은 사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삶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 순간, 이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아, 이 소중한 인생! 나에게 주어진 이 고마운 시간! 나의 원더풀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