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겪었던 갈등 상황을 하나 떠올려 보라. 그 일은 나 또는 상대방의 일방적인 잘못이었는가, 아니면 양쪽 다 일부 책임이 있었는가?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는 보통 한 쪽만 비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춘기 아이가 퉁퉁거리는 데는 호르몬의 영향도 있겠지만, 잔소리하는 부모의 양육 방식도 한몫을 한다. 그런데 부모가 왜 그렇게 잔소리를 하게 되었냐 하면 그동안 아이가 미덥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왔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좋든 싫든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중독자와의 상호의존 관계
이런 상호작용이 조금 더 극단적이고 병리적인 양상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중독이나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아픈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종종 나타난다.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포르노 중독, 도박 중독 등의 증상을 보이는 사람의 옆에는 이 사람을 고쳐주거나 도와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enabler, 혹은 co-dependent) 다시 말해서, 중독자의 옆에는 그 사람을 도와주거나 고쳐주려는 co-dependent, 상호의존적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중독자를 도우면서 동시에 그 중독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다소 충격적이다. 그들은 남을 돕는 역할에 익숙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사람들을 계속 찾아다니는 경향을 보인다.
중독자가 필요한 사람
필자와 같은 상담자나 목회자도 이런 co-dependent의 특성을 발전시키기 쉬운 위치에 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뭔가 부족해 보이고 안타까운 사람에게만 자꾸 마음이 가고,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계속 도와주거나 고쳐주는 역할을 반복하고 있다면, 내가 co-dependent의 특성이 있는 사람이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Co-dependent에게는 항상 옆에 아픈 사람, 내가 도와주고 고쳐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 도움으로 상대방이 나아지고 정서적으로 독립을 찾아가게 되면 그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까봐 불안해진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묘하게 불편하고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기도 한다.
“너에겐 내가 필요해!”
얼마 전에 상담실을 찾아온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에 데이트를 했던 모든 사람이 약물에 중독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자신도 마약에 중독되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남자들과는 교제를 시작하기가 편치 않았다. 자신의 과거나 약점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남편 역시 향정신성 약물과 코카인 등의 마약이 없으면 제대로 깨어 있지 못하는 상태였다. 처음에 남편은 뒤늦게 전공을 바꿔 다시 시작한 대학 과정에서 숙제를 해내야 한다는 이유로 주의력결핍장애에 사용되는 약물을 사용하며 며칠씩 잠을 자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밤새 어지럽혀 놓은 거실에서 코로 들이마신 약과 코카인의 흔적들을 발견하곤 했다. 남편은 흥분상태에서 며칠을 보내며 아내가 모르는 사이에 밤새 온라인 쇼핑으로 쓸데없는 물건을 사들이곤 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남편을 이해하고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같이 살면서도 둘이 마주앉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에게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화가 나는지 말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라도 남편을 이해해줘야 하고, 또한 중독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편의 심각한 중독 문제를 뻔히 보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이다.
진정한 도움을 주는 지혜
그녀는 매주 상담소를 찾아 남편의 중독 문제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했다. 남편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에는 자신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중독 문제가 워낙 시급했기 때문에 자신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문제, 그로 인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문제, 그리고 중독자인 남편에게 중독된 자신의 문제 등을 모두 뒤로 미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상담 중에 남편의 중독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분노 등의 복잡한 심정을 솔직하게 꺼내 놓지 못하는 부분에 이르게 되자, 이 아내는 자신 안에 감추어진 또 다른 두려움을 깨닫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이 문제를 직시하게 되면 자신이 남편을 떠나든지, 남편이 자신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변화가 극도로 두려웠던 것이다. 남편에게 자신이 얼마나 무력감에 시달리는지 토로하면 남편이 자신을 싫어하고 멀리할 것 같았다. 남편에게 약한 부분이 있어야 자신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남편의 중독을 방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이 도와줌으로써 상대방이 나를 더 의지하게 만드는 매우 극단적인 상황이었다.
도움을 주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조금만 붙들어주고 위로해 주면 어려운 때를 지나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상대가 계속 나를 너무 의지하게 만드는 것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나의 욕구에서 비롯된 의존관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 때 나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잘 살펴야 한다. 도와주는 사람이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자신의 두 발로 굳게 서도록 지혜롭게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상대가 더 이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오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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