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 당기는 게임, ‘밀당’
미국에서도 노스 캐롤라이나의 작은 도시에 살다 보니 인터넷에 올라 오는 수많은 신조어들이 꽤나 낯설다. 마음먹고 공부(?)하지 않으면 뭐가 뭔지 몰라서 사오정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가정과 인간관계에 대한 강의를 하다가 청년들에게 주워 들은 말 중에 ‘밀당’이라는 단어가 있다. 주로 데이트하는 남녀 관계에서 밀고 당기는 역동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이 밀당은 사실 부부 사이에서나 자녀와의 관계, 더 나아가 많은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인간관계에서는 1+1=2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너와 내가 만나면 그저 단순한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독특한 관계의 기류가 형성된다. 그리고 만남이 길어지면 두 사람의 밀당으로 둘 사이에 새로운 상호작용의 패턴이 자리잡게 된다.
인간관계의 역동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른 면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참 좋고 재미있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하고 붙여 놓으면 영 딴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그룹 속에 있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경우도 있다.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이 빚어 내는 역동의 예술이다.
예를 들어 성격이 강하고 리더쉽이 있는 사람은 옆에 잘 따라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난다. 재미있고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옆에서 깔깔깔 웃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더 신이 난다. 과묵하고 조용한 남자는 발랄하고 수다스러운 여자를 소개시켜 주면 잘 맞는 커플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상한 것은, 성격이 똑같은 사람들이 만나면 갈등도 없고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재미없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둘 다 조용하거나 남에게 잘 맞춰주는 부드러운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답답해 하고, 반대로 둘 다 강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스타일이 만나면 훨씬 더 많이 부딪친다.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만나면 단순한 1+1이 아니라 상호작용과 역동(Dynamic)이라는 플러스 요소가 생겨나는 것이다.
밀당의 부작용
그런데 이 상호작용이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집안 일을 하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금기였다고는 하지만, 하다못해 벽에 못을 박거나 뭘 고치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이사를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이삿짐을 싸시고, 다른 식구들은 학교나 직장에 갔다 오면 이사가 다 끝나 있는 식이었다. 가끔 아버지에게 어떻게 벽에 못도 하나 못 박으시냐고 놀리면 그저 웃기만 하셨다.
그런데 요즘 들어 집안일을 못하고 느긋하신 아버지 뒤로, 급하디 급한 성격의 어머니가 함께 보인다. 설거지가 조금만 쌓여 있어도 못 참고, 집안에 액자 하나 비뚤어져 있는 것도 못 견디셨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시키면서 잔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당신이 그냥 해 버리는 것이 속 편하셨다.
이렇게 부지런한 어머니 덕분에 아버지는 점점 더 집안일을 할 줄 모르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남편이 되어 가셨다. 성격이 불 같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잡고 야단치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아버지는 저만치서 뒷짐을 지고 있거나 아이들과 놀아주는 역할에만 익숙해지셨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야단치는 어머니가 악마고, 놀아주는 아버지가 천사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천사 역할(Good guy) 뒤에는, 악마 역할(Bad guy)을 짊어진 어머니의 공조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절반의 책임
부부관계에서 한쪽 이야기만 들으면 상대 배우자는 세상에 몹쓸 사람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한쪽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만 살아. 그 인간 못쓰겠네’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다른 한쪽의 이야기가 더해지는 순간 전혀 다른 그림이 완성된다. 그래서 싸움에서는 늘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 봐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상담실에 찾아온 아내가 말을 안 하는 남편 때문에 속상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예전에는 남편이 과묵해 보이고 진중해 보였는데, 이제는 꾹 다문 입에서 구린내가 날 것 같다며 화를 낸다. 집에 오면 맨날 TV나 컴퓨터만 쳐다보고, 그도 아니면 차고에 틀어박혀 있단다. 아내나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다음에 남편분을 함께 모시고 오게 했다.
부부가 함께 상담소를 찾으면서 예상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질문을 받고 남편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을 못 참고 아내가 중간에 끼어든다. 머뭇거리는 남편 대신 설명을 하고, 남편이 대답할 말을 먼저 나서서 알려주면서 남편에게 대답을 제대로 못한다고 타박한다. 말수가 적은 남편은 더 입을 다문다. 남편이 입을 다물자 아내는 더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진 아내는 남편의 입을 더 꾹 닫게 만든다. 나와 상대가 서로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상호작용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의식하든 못 하든 늘 밀고 당기는 ‘밀당’의 상호작용 안에서 산다. 미는 사람이 있으면 당기는 사람도 있다. 계속 미는 사람은 밀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심해진다. 상대가 계속 물러서는 사람이면 다가서고 채근하는 상대의 특성이 더 강화된다. 이 상호작용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 재미있기도 하고, 더 망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방만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 저 인간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다고. 그런데 사실은 그 게임의 절반은 내 책임이다. 내가 한 파트를 담당한 밀당 게임에서 나로 인해 상대방이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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