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열차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허영자 (1938~ ) 경남 함양 출생. 196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으로『투명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위하여』,『마리아 막달라』, 『꽃 피는 날』, 『친전』 등이 있다.
▶ 시 해설
현대는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여기저기로 고속도로가 뚫리고, 특급열차 KTX가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지구촌 시대를 열어 하루 낮 동안에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갑니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판에 급행열차를 놓쳤다면 낭패라고 생각할 터인데, 시인은 오히려 급행열차를 놓친 것이 잘 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왜 일까요?
조그만 간이역까지 다 정차하는 완행열차를 탔기 때문에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둠에 젖어 있는 서러운 종착역의 고즈넉한 풍경을 보면서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이 차근차근 엮어가는 인생의 기쁨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놓치면 고속전철을 타고 떠날 수 있는 요즈음에는 간이역의 ‘쓸쓸한 아름다움’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빛의 속도로 정보가 달려가는 속도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요.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을 가르쳐준 그 완행(緩行)을 추억하면서 우리 삶에 숨어 있는 작지만 소중한 일상의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