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못 갈 수도 있지!
결혼하고 첫 명절에 인사할 곳이 많다며 친정에 못 감. 그땐 처음이라 이해했지만, 작년 추석 황금연휴에도 성묘 갈 곳이 많다, 시누이가 왔다, 하면서 일주일 동안 나를 끌고 다님. 8일차에 친정 갔지만 피곤해서 잠만 자다 옴. 집에 와서 대판 싸웠는데 ‘출가외인’, ‘며느리 도리’ 운운하며 남편이 본색을 드러냄. 며느리니까 시댁 일 챙기다보면 친정 못 갈 수도 있는 거라고 함. 연애할 때 이런 기색 손톱만큼도 못 느꼈는데 결혼하자마자 본색 드러낸 것임. 각 방 한 달 지냄. 그러다 먼저 사과하길래 명절 당일에 아침 먹고 바로 나와서 친정가는 걸로 합의함.
명절에 잡힌 미국 출장
그런데 12월 중순쯤, 남편이 달력 들고 오더니 “이번 구정 연휴에 양쪽 다 가기는 힘들겠지?” 이럼. 그래서 또 싸움. 하지만 신은 나의 편!
다음날 출근했더니 2월에 부사장님과 함께 가는 출장 발표가 난 것임. 신은 나의 편이 분명함!
그리하여 나는 월요일에 한국을 떠나 지금은 미쿡임. 다음 주에 돌아감~. ㅋㅋㅋ
2월에 출장 간다고 1월부터 얘기함. 근데 일요일에 출장 짐 싸고 있는데 내가 쇼하는 줄 암. 그래? 그럼 쇼를 시작하지~!
출국 직전에 누가 봐도 인천공항이구나 싶은 배경으로 인증사진 찍고 티켓 사진 찍어서 보냄. 남의 편은 그제야 난리나서 전화에 불나길래 폰 꺼버림. 어차피 비행기 타면 곧 꺼야 하니까.
아, 그리고 늘 우리 같은 핫바리는 지구 100바퀴를 돌아도 이코노미였는데, 명절 출장에 부사장님 찬스로 비즈니스!!! 처음 앉아봄. 넘나 편함. 도착해서 폰 켰더니 이혼 어쩌고 하길래 오케이 했음. 그런데 순순히 해줄지 모르겠네, 그 쪼다가^^
참고 사는 게 더 큰 불효다!
출장에서 돌아와 바로 부모님 집으로 갔음. 등짝 몇 대 맞고 눈물 한 바가지 쏟으며 가족 드리마 한 편 찍음. 첫 명절은 우리 부모님도 이해하셨지만, 그동안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던 예단 문제로 인한 시댁과의 갈등, 집들이 와서 혼수 해 온 걸로 생트집 잡던 일, 시댁 식구들 경조사는 사돈네 팔촌까지 챙기면서 친정 일은 개무시하던 그간의 행적들을 빠짐없이 말씀드림.
부모님이 더 볼 것도 없으니 이혼하라고 하심. 부모 마음 아플까봐 행복한 척, 괜찮은 척 참고 사는 것이 더 큰 불효라며 지지해주심. ㅠㅠ 엄마는 나를 붙들고 우시고, 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꾹꾹 참으시던 아빠한테 너무 죄송했음.
부모님이 남의 편 불러서 이혼하라 하셨는데 이 인간이 억울해 죽겠다고 함. 잘못은 내가 했는데 적반하장으로 이혼 운운한다고. 명절 사건은 물론 자기가 잘못했지만 그거 말고는 이혼당할 정도의 문제는 없었다고. 내가 명절에 일방적으로 출장 간다고 당일에 통보하고 날랐다나? 어차피 그 주에 시댁 가야 하니까 미리 짐 싸는 거면서 출장 간다고 쇼하는 줄 알았다고 함. 짐 사이즈를 보면 모르나? 진짜 똥멍청이…
누가 겁낼 줄 알아?
결혼하고 그동안 나름 견뎌보려고 했는데,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들이닥치니 사람이 멍해지고 뭔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음. 그러다 결정적으로 명절 때 또 자기 집에만 갈 속셈을 보이니 뭔가 탁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음.
암튼 그날 부모님과 옷 챙기러 집에 갔음. 그런데 이게 뭐? 싱크대 위에 이혼서류가 뙇!!! 고맙게도 이런 걸 다 준비해주고 이혼 생각 없다더니 이혼서류도 다 써놓고 도장까지 예쁘게 찍어 놓음. 얘가 나를 진짜 호구로 알았구나 싶음. 이걸로 날 헙박하려고? 이혼서류 들이 밀면 내가 빌 줄 알았나 싶은 게 되게 허무했음. 이 인간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쓰레기라는 걸 그때 알았음.
시모 전화 와서 여자는 이혼하면 손해라느니, 이혼녀 딱지 달고 사는 게 쉽겠냐는 둥 난리남. 그래서 시모에게 이혼 방해하면 소송을 걸겠다 함. 이혼에 대한 내 생각이 이렇게 확고하단 걸 나도 처음 알았음.
근데 이렇게 쿨한 척 하지만 사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님. ㅠㅠ 부모님 얼굴 봐서 씩씩하게 처리하고 무너지기 싫어서 억지로 참고 있는 거임. 이런 거지 같은 일 빨리 끝내고 시원하게 울든 웃든 하고 싶음.
남의 편, 너 아웃!
사실 이게 내 얼굴에 침 뱉기라 아무리 둘러봐도 털어놓을 곳도 없고, 자꾸 한숨만 나옴. ㅠㅠ 그래도 댓글에서 알려주는 대로 통화내용과 카톡 내용 저장하며 씩씩하게 준비하고 있음. 그 와중에 시어머니와의 통화 내용에 또 한번 좌절. ㅠㅠ
결혼 전에 연애 3년 했음. 그 당시 남친이 좀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줘서 크게 문제되지 않았음. 결혼 초기에도 시댁과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나름 막아주려고 노력했는데, 날이 갈수록 차츰 발을 빼는 느낌이랄까? 작년 추석 전후로 태도가 확 바뀜.
시댁의 괴롭힘은 계속되고 어찌어찌 문제 하나를 겨우 해결하면 또 다른 갈등…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는데, 그 달력 갖고 와서 징징대는 얼굴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듬. 더구나 중간에 출장을 가게 되면서 냉정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됨.
나는 한번 돌아서면 끝장인 성격이라 이런 구질구질한 일 빨리 끝내고 싶음. 근데 이 인간은 나보고 진짜로 이혼할 거냐고 또 징징거림. 내가 장난하는 줄 아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혼한다고 말해줌. 너네 엄마가 막말한 거 한 번 들어보라고 녹음된 음성 파일 보내주고, 이혼에 협조 안 하면 소송 걸겠다고 얘기함. 나도 모르게 자꾸 울컥하지만 나는 잘 해낼 거임!
출저: 네이트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