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교육 [상담 칼럼] 새로운 날을 위한, 과거와의 화해

[상담 칼럼] 새로운 날을 위한, 과거와의 화해

0
[상담 칼럼] 새로운 날을 위한, 과거와의 화해
새로운 날을 위해서는 아픈 과거와 화해해야 한다. ©pixabay
심연희 대표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RTP지구촌교회 사모

새 꿈으로 시작하는 새해

어느 새 2018년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신년이 되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많은 새로운 결심들을 한다. 새로운 목표, 새로운 관계, 그리고 새로운 자신을 꿈꾸며 마음이 부푼다. 그동안 별로 이루지 못했던, 올해는 꼭 성경 통독을 하리라는 결심으로 다시 한번 창세기를 펼치기도 하고, 배에 왕(王)자 근육을 새기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다이어트를 선포하고 헬스장으로 향한다. 올해는 기필코 결혼을 하리라, 소원해진 가족관계를 다시 회복하리라 마음 먹기도 한다. 새 해는 새로운 꿈과 희망을 생각하기에 참 좋은 때다.

내 마음의 감옥

그런데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에 문득문득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의 과거이다. 우리가 겪었던 과거의 경험들, 나를 배신했거나 상처 주었던 누군가의 존재가 우리의 새 출발을 방해하는 복병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불행이 또 다시 반복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시금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기가 두려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뼛속까지 사무친 과거의 기억들로 형성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하기 어려운 상처

상담자로서 우리를 거쳐갔던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 기억을 털어내고 일어나야 하는지, 왜 다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감히 조언할 수 없는 경우가 정말 부지기수다.

심한 우울증으로 상담소를 찾은 C씨는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에게는 이복 형제가 25명쯤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C의 아버지는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옮겨가며 그들의 수입에 의존해 살았다.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자식들에게 양말 한 짝 사줘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쪽으로도 이복 형제가 10명쯤 있었다. 마약에 중독되어 있던 어머니는 자녀들을 돌볼 수가 없었고 C를 비롯해 다른 형제자매들은 양가의 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들의 집으로 흩어져 자랐다. 그 와중에 학습장애가 있던 C씨는 끝까지 글을 읽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세 자녀를 둔 C씨는 자신의 손으로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닥치는대로 막노동을 해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마주쳤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들, 즉 손주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 동안 누르고 참아왔던 서운함과 미움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터진 울음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아버지는 손주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부모였다. 그들을 용서하고 다 잊으라는 말이 과연 C씨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과거와의 화해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관계에는 꼭 넘어가야 하는 하나의 고비가 있다. 그것은 나의 과거와 화해하는 작업이다. 때로는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치유가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을 Radical Acceptance(급진적 수용)이라고 부른다.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실을 급진적으로, 극단적으로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나의 과거를 나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나의 아픔과 나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나의 상처나 고통을 있었던 사실로 그대로 받아들일 때, 더 이상 내 자신과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내 자신을 부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요셉의 화해와 용서

그런데 이러한 받아들임의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감한 용서로 승화시킨 우리의 믿음의 선배가 있다. 바로 요셉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형제들에 의해 인생이 망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형제들 때문에 노예가 되었고, 형제 때문에 감옥에 갔다.

요셉이 우리 상담소에 찾아와 형제들의 시기심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었고 외국으로 쫓겨와 억울한 범죄자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아마도 형제들을 고소해서 감옥에 보낼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과거 자신의 상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신을 죽도록 미워했던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 시라(창 45:7-8).”

그에게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놀라운 안목이 있었다. 자기 안의 상처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았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을 믿고 의지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요셉은 그런 과감한 용서가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

이제 2019년,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꿈과 새로운 날들 앞에서, 새로운 관계들 앞에서, 이제 과거의 아픈 상처에서 벗어나 한 걸음 나아갈 때가 된 것이다. 우리 마음을 늘 괴롭히던 지난날들과 화해할 기회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미움의 감옥에서 우리를 꺼내올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

그 지옥 같이 고통스러운 시간들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 그리고 동행하심이 있었다는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과거의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화해와 용서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절대 놓지 않으셨던 그분의 사랑에 의지할 때에 우리는 과거와의 화해와 용서가 가능해진다.

칼럼에 대한 회신은 [email protected] 으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