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봐요
얼마 전 20대 중반의 아가씨가 상담소를 찾아왔다. 그녀의 고민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직장에 가면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동료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얼마 못 가 그만둬 버리는 것이 그녀의 패턴이 되었다.
새 직장의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인터뷰가 잡히면 불안감은 극도로 높아져서 인터뷰에서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지 미리 걱정하느라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고 열정적으로 보여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공황장애와 같은 극심한 불안증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과 눈도 잘 못 마주치고 그들의 관심이 부담스럽다.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 자신이 뭐라 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으며,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들키게 될까봐 어떻게든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려고 한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구나.’
이 아가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니, 그녀는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책을 좋아했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 홀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특성 때문에 흑인들 사회에서 ‘이상한 아이’로 놀림을 받았다. ‘Nerd’, 즉 공부벌레라는 별명은 미국 사회, 특히 흑인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기에 충분했다. ‘공부벌레’는 이 아가씨가 자란 환경 속에서는 ‘이상한’ 부류에 속했던 것이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게 되자, 이 아가씨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해도 자신이 이상한 사람인 걸 눈치챌까봐 가슴이 철렁한다.
이 아가씨가 치열하게 살아온 삶 속에서 배운 것은 ‘나는 이상한 사람,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왜곡된 믿음이 굳어져 지금은 이 아가씨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왜 나를 못 믿어요?”
예전에 우리 교회 수련회 때 있었던 일이다. 한 자매가 직장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출발하지 못하고 일을 마친 후 혼자 운전을 해서 와야 했다. 아직 GPS라는 놀라운 기술의 축복이 없었던 때라, 밤에 자매 혼자 수련회 장소를 찾아 오는 것이 걱정되었던 목사님은 그 자매에게 두 번 세 번 확인을 했다. “오는 길 알겠니? 괜찮겠어? 길이 너무 어둡고 시골이라 더 힘들텐데… 길을 다시 알려 줄까?” 그 자매가 길을 못 찾아 올까봐 걱정하고 챙기려는 목사님을 보고 아마도 주변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 참 자상하기도 하셔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는 돌연 화를 버럭 냈다. “목사님! 왜 저를 못 믿으세요!” 너무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이 자매를 보며 꽤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상황, 즉 보통 사람과 다른 감정 패턴과 마주칠 때, 우리는 ‘이 자매 성질 못 쓰겠네.’ 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다면 한 걸음 다가가 잠재된 원인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 자매에게 내재된 분노의 원인은 가족이었다. 그녀에게는 아들만 편애하시는 부모님, 늘 똑똑하고 잘 나가는 남동생,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가 있었다. 가족 들 사이에서 그녀는 그저 나이값 못하는 장녀에 불과했다. 뭐든 척척 잘 해내는 남동생에 비해 자기는 늘 20% 부족한 자식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누군가 그녀에게 “이거 할 수 있겠어?”라고 물어보면 그 말은 곧 ‘너는 믿을 수가 없어.’로 들렸고, “좀 도와 줄까?”라고 물으면 그 말은 곧 ‘너는 왜 그런 거 하나도 똑바로 못하고..’로 들리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그릇된 믿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색을 입힌 썬글라스를 쓰고 산다. 자라면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각자의 필터(Filter)가 형성되고 그 필터를 통해 세상만사를 해석한다. 그것이 자기만의 인생각본(Life script) 즉, 인생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굳어지면서 점점 그 틀에 맞는 증거만 수집하게 된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해.” “I am not good enough.” “결국 모두가 나를 버릴 거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런 자기만의 스토리는 그 사람이 자라온 문화, 어린 시절의 경험, 성격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자신에 대한 믿음이 굳어지면 그에 맞지 않는 다른 모든 ‘긍정적 증거’들은 무시된다. 자신을 믿어주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다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가끔씩 나를 무시하는 듯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며 확신을 더해 간다. ‘나는 정말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구나.’
새 썬글라스를 쓰자
내 불행한 인생 스토리의 저자가 바로 나이며, 내 왜곡된 필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생에 대 전환이 일어난다. 부모 때문에,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내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다고 원망하던 희생양의 자리(victim position)에서 빠져 나와, 긍정적인 필터로 교체하고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스토리를 쓰겠다고 결심할 때 내 앞에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우리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 좋은 책, 그리고 신의 한마디가 그 스토리를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내가 만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매일 새로운 스토리를 쓰게 하셨다. “너는 내 자녀다(요 3:16)”, “내가 너와 함께 한다(사 41:10).”,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벧전 2:9).” 그 후 오늘 내가 하나님과 함께 쓰는 인생 스토리가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이며, 내 삶은 하나님께서 써 가시는 대 서사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제 새 썬글라스를 쓸 때가 되었다. 새 썬글라스에 어떤 색을 입히고 싶은가. 우리는 모두 좋은 점과 덜 좋은 점을 가진 존재이다. 기왕이면 밝은 색 썬글라스를 쓰고 삶의 밝은 면에 집중하며 사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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