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구두
대기업 공장에서 책임자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영국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히드로 공항 면세점에서 명품 구두 한 켤레를 샀다. ‘화려한 청춘을 안전화만을 신으며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괜찮은 명품 구두로 내 영혼을 위로하자’라는 말로 명분을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효용성이 없었다. 불편했다. 늘 구두를 의식해야 했다. 공장에는 온갖 장애물이 있다. 예전에는 안전화를 신고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녔는데, 이제는 자꾸 구두를 의식하며 걷게 되었다. 물이 고인 곳은 피하고, 무엇인가에 부딪치면 혹시나 가죽이 상하지 않았는지 신경이 쓰였다.
근처 식당에 갈 때도 늘 구두가 걱정됐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신발을 벗어 놓던 내게 식당 입구에 붙어 있는 ‘구두 분실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비닐봉지에 구두를 담아 밥 먹는 내내 옆에 두어야만 했다.
공장 책임자인 나는 하루에 보통 2만보를 걸어야 했는데, 그 구두를 신고는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발이 아팠다. 비 오는 날이 결정적이었다. 비 오는 날 공장을 도는데 물이 새면서 발이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비싼 구두가 물이 새다니!
어느 날 명품 구두 매장에 들러 물이 새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직원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길을 걷는지 등등을 자세히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매장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이 구두는 많이 걷는 사람을 위한 신발이 아닙니다. 또 비 오는 날에는 가능한 한 이 구두를 신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개발에 편자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 말이 좀 섭섭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왜 명품 구두를 신을 수 없느냐, 명품 구두 신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느냐 하는 반발심도 생겼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분 말이 맞았다. 공장에서 발품을 파는 내게 명품 구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1년도 안 돼 명품 구두를 폐기 처분했다. 너무 험하게 신어서 더 이상 신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원래대로 다시 안전화를 신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구두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기뻤다. 어느 곳이든 거리낌없이 다닐 수 있고, 돌부리에 채여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식당에서도 더 이상 비닐 봉지에 구두를 담을 필요가 없었다.
명품 만년필
한번은 지인이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워낙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성격이라 한 번도 명품 만년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멋진 선물을 받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에 열심히 몸에 지니고 다녔다. 디자인도 예쁘고, 잘 써지고, 그 만년필을 꺼내 들면 사람들이 나를 다시 보는 것 같은 착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어쩌다 만년필이 눈에 안 보이면 잃어 버렸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만년필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년필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날이 왔다. 만년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처음엔 정말로 아까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평화
언제 마음의 평화가 깨질까? 바로 자기 분에 넘치는 걸 소유하고 있을 때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걸어다니는 사람이 명품 구두를 가질 때, 밥 먹듯이 물건을 잘 잃어 버리는 사람이 명품 만년필을 가질 때 마음의 평화는 깨진다.
이는 재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자기가 가진 재물에 혹시라도 손실이 생길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재물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재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재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유명해지는 것, 인구에 회자되는 것, 누군가가 내게 열광하는 것도 모두 같은 이치다.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자신의 마음을 느껴보자. 마음이 어딘가 불편한가? 그렇다면 혹시 자신의 분에 넘치는 것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기 바란다.
나는 홀가분한 삶을 원한다. 내가 하는 일도 그렇다. 언제든 문을 닫고 떠날 수 있는 일이 좋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 날 故 박경리 소설가처럼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라는 말을 하면서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