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글씨 예술가
서촌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강병인 작가의 캘리그라피연구소를 찾아가는 길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골목에 들어서자 그가 언제나처럼 머플러를 두르고 예술가 본능 충만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날리며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통창으로 해가 가득 들어오는 연구소에는 지난 20여 년간 강 작가가 작업해온 작품들로 가득했다. 진로 참이슬, 배상면주가 산사춘, 담배인삼공사 홍삼원, 한국야쿠르트, 웅진 아침햇살 등의 주류와 음료, 오뚜기 열라면을 비롯한 풀무원, 백설, CJ제일제당 등의 식료품에 이어 다나한 화장품 캘리그라피, 더 나아가 대하드라마 대왕세종, 정도전, 그리고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송곳, 미생, 장사의 신 등 모두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들이 강 작가의 글씨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글씨 예술가다.
추사체를 한글로
이런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강병인 작가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글씨 예술가로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과,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혁신적인 글씨 쓰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멋글씨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한글 멋글씨, 즉 캘리그라피를 그저 예쁜 손글씨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무조건 흉내내기부터 시작하죠. 하지만 글씨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본질을 공부하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예 공부가 필요하지요. 서예의 정신과 철학을 알고, 그 위에 자신만의 생각을 넣는 과정이 있어야 해요. 즉,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스타, 추사 김정희 선생님처럼요!”
평생 글씨를 쓰며 살겠다 다짐하고 스스로 호를 영묵(永墨)이라 지은 것은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우리나라 서예의 혁명가였어요. 청나라의 뛰어난 학자들조차 김정희 선생님의 글씨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저도 김정희 선생님의 글씨를 보고 공부하면서 이분이 쓰신 한자를 우리 한글로 옮겨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어요. 특히 추사 선생님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썼던 한글 편지의 글씨체는 얼마나 힘이 있는지 저는 공부하면서 늘 감탄했습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
작품 글씨 하나를 쓸 때마다 산고의 고통을 느낀다는 강병인 작가는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본질에 충실하며 끊임없이 기본을 공부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는 법고창신의 자세를 강조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자세로 공부하면 됩니다. 한글 서예나 글씨를 잘 쓰려면 먼저 훈민정음체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 판본체(반각체), 그리고 궁체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본을 다진 후에 창신이 가능합니다. 본질을 이해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을 넣어야 합니다. 시작은 다 다르고 처음부터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더 좋은 글씨를 쓰려는 공부와 노력이 중요합니다.”
글자에서 소리와 뜻이 보이다
강병인 작가의 글씨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글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탁월한 솜씨 때문이다. 그의 글씨를 보면 그 대상이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고 살아 있는 듯이 느껴진다. 이것은 중학교 이후로 붓과 먹을 손에서 놓지 않고 법고창신하며 살아온 결과물일 것이다. 이는 비단 글씨 공부뿐만 아니라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한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저의 출발점은 ‘한글에서 소리와 뜻이 보이게 하자!’였습니다. 훈민정음 제자원리를 공부하면서 천인지(天人地)의 공간관계와, 모음의 태극체계 속에 우주의 원리와 생명의 순환이 들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를 바탕으로 소리를 나누고 합친 글자, 소리도 뜻도 형상도 보이는 글자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흔히 한자는 상형성, 조형성이 뛰어나지만 한글은 조형성이 없는 소리글자라고 한정합니다. 하지만 한글 역시 독특한 조형성을 자랑합니다. ‘봄…’ 듣기만 해도 설레지 않습니까? ‘꽃’이라는 글자를 보세요. 초성은 꽃잎, 중성은 가지, 종성은 뿌리입니다. 이처럼 한글은 소리와 뜻이 보이는 형태를 가진 글자입니다. 그래서 한글은 변화, 여백, 조형성을 가미하면 다양한 글씨체가 가능하고, 그 안에서 연결성과 통일성을 찾아 누구나 자신만의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현지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나 역시 ㅓ와 ㅏ, ㅗ와 ㅜ, ㅡ와 ㅣ사이의 순환 원리에 따라 소리를 적고 뜻이 보이게 가르친다면 훌륭한 한글 교육 방법이 되겠다는 생각에 흥분될 정도였다.
서로 다름과 나다움
“이렇게 다양한 글씨체가 가능한 한글은 서로 다름과 자기다움을 인정하는 인류애를 바탕으로 매우 민주적이고 쉽게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Think Different!’ 역시 이런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발상이 발전을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이 아닌 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고 하지만,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함께는 의미가 없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나다움을 찾아야 같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나다움을 찾고 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광화문 한글 현판
강병인 작가는 현재 광화문 현판을 기존의 한자 대신 한글로 바꾸자는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한글을 당연히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한글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바꾸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광화문 훈민정음 현판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얼굴을 되찾는 일입니다. 이 시민운동의 목표는 내년 한글날에 훈민정음 현판을 걸어서 세대와 이념을 넘어 온 국민이 하나가 되고, 이것을 지켜보는 전 세계인도 함께 참여해서 온 세상이 하나가 되는 즐거운 축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문화재를 복원할 때는 원형 복원의 원칙을 따른다. 그러나 현재 광화문의 한자 현판은 글씨의 윤곽도 제대로 안 보이는 작은 사진에서 확대하고 다듬어 만든 글씨여서 기운생동이 없다. 따라서 이를 두고 원형 복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국회의원 이병훈 의원도 지적한 바 있다.
“광화문 현판만큼은 한글 현판을 걸 수 있도록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 계신 교민들과 한글을 사랑하는 세계인들이 함께 뜻을 모아 작은 행동이라도 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된 마음과 뜻이 있다면 지금 그 자리에서 동참할 수 있고, 그 작은 힘들이 모여 큰 힘이 되고 변화와 혁신을 일으킬 거라고 믿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속의 문화강국으로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해외 한인들도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을 점점 당연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역사적인 자리인 광화문에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이 걸린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 한인들과 세계인들 모두가 한글에 담긴 정신과 아름다움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강병인 작가의 말처럼 해외에 있는 재외국민들도 이 운동에 함께 해주시면 좋겠다. 인터뷰가 끝난 후 강병인 작가는 “봄날”이라는 글씨를 선물해주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언제나 갓 피어난 따스한 봄날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