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연구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아직도 일상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아이들의 학교는 주 5일 등교를 준비하고 있다. 확진자는 계속 늘어가는데 우리가 과연 이 바이러스를 컨트롤하는 데 성공하고 조만간 코로나 시대를 졸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시점에서 바이러스와 함께 생활하며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한상오 박사를 만나본다. 현재 듀크대 의과대학 소아과에서 근무하는 6년차 유전자 치료 연구 시니어 사이언티스트다.
위기 속의 기회
먼저 어떻게 듀크대 연구원이 되셨는지 제일 궁금하다.
“저는 원래 화학 전공자예요.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요. 그런데 97년 IMF 사태 이후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졌어요. 그 시절엔 학생들 과외를 하는 대학원생이 많았는데 그런 아르바이트 자리조차 거의 없어졌죠. 그러던 중 99년에 미국 유타대 약대에서 근무를 하게 됐어요. 공부도 병행하면서요. 거기서 한 2년 정도 근무한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죠. 그런데 합성물질을 이용한 치료에 대한 저의 연구가 2000년 미국 유전자치료학회에서 수여하는 최고 연구자상을 받아 버렸어요. 덕분에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됐죠. 그러다 셋째를 출산하는 바람에 암 치료 연구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그후 생물학으로 박사과정을 했어요. 일을 하다보니 화학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더라고요.”
생물학 과학자
아이 셋을 둔 가장으로서 힘들게 박사학위까지 마쳤다면 그후로는 생활이 좀 나아졌을까?
“저 같은 생물학 과학자들의 연봉은 솔직히 그리 많이 받는다고 말할 수 없어요. 아마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 수입의 반도 안 될 거예요. 왜냐하면 생물학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연구소나 제약회사 정도 밖에 없거든요. 생물학자에 대한 수요에는 한계가 있는데 공급이 계속되니 넘쳐 버린 상황이죠. 학교 교직도 지금은 박사학위 취득 후에 최소한 10년은 기다려야 얻을 수 있다고 해요. 그러다보니 후배 학생들에게 가급적 졸업 후 의대로 전공을 옮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한국인의 장점
오래 전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체세포 복제 위조 사건을 많이들 기억하실 것이다. 비록 그 논문이 사이언티스트지에서는 등재취소가 되었지만 유명한 어록 하나를 남겼다. “한국인은 젓가락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이나 의학기술 실험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라는……. 정말 그럴까?
“한국사람이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기는 미국이고, 저는 일개 연구원일 뿐이라 시스템이 저에게 맞춰주지는 않지요. 그래서 저는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예를 들면 중간고사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험을 보지만, 일단 적응을 하면 기말고사는 굉장히 잘 치르는 식이었죠.”
게으른 천재는 노력하는 범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스쳐갔다.
코로나 바이러스
바이러스 연구자이니 지금 우리 생활을 이렇게 만든 코로나 19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보았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는 이미 다들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코로나라는 이름은 독감 바이러스의 변종이고 2019년에 창궐해서 숫자 19가 붙은 거죠. 그런데 이게 걸리는 사람마다 반응이 모두 달라요. 치사율은 낮지만 전파력은 너무 세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아니다를 말할 수도 없고요. 또 정치에 이용되는 부분도 많지요. 무조건 손 잘 씻고 마스크 잘 쓰고 다닌다면 전파력은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집단면역은 완성되기까지의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봅니다.“
함께 만드는 세상
이분은 나이 50에 축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해보니 너무 좋단다.
“제가 원래 심장병을 앓고 있었어요.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애가 바로 저였죠. 그런데 46살에 듀크대에서 심장수술을 받고 한 2년 회복기간을 거친 후 테니스를 시작했어요. 그때 지인이 축구를 해보라고 권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젊은 친구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졌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풍물패에서도 활동하는데 2017년 한국의 촛불시위를 보고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우리도 여기서 무언가 알리는 활동을 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하게 됐어요.”
예전에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상오 박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무엇을 크게 만들고 완성한다기보다는, 같이 무언가를 하고 알리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게 우리가 바라는 한인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밖을 내다보니 저녁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내일은 더 늦기 전에 가족들과 단풍구경이라도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