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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의 인터뷰] 그린빌의 좋은 친구 박성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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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의 인터뷰] 그린빌의 좋은 친구 박성윤님
제롬, 사진가 [email protected]

그린빌의 친구
5년 전 대한민국의 세월호 사고 이후 4월은 우리에게 참으로 잔인하고 힘든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미안하고 이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그린빌 사람들’은 올해도 그날을 기억하고 우리 안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한 5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오늘 만날 사람은 그 행사의 기초를 다지고 시발점을 만들어준 사람이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독자분들도 잘 아시는 이 신문에 영화 칼럼을 쓰고 있는 박성윤님이다.
그 동안 한번은 만나봐야지 생각하면서도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멀리 이사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야 부랴부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피아노를 치던 소녀
먼저 그린빌에 와서 살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부터 물어보았다.
박성윤님은 남자친구의 유학으로 일찍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5년만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왔는데, 남편이 졸업 후 피츠버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로 현재 그린빌까지 미국이라는 타향에서 생각지 않은 모험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와서 가정주부로 살고 있지만, 그녀는 피아노를 전공한 재원이다. 성당에서 성가 반주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여러 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 재능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법도 한데, 본인도 아쉬움이 크지 않았을까?
“제 의지와 상관없이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이만하면 많이 쳤지’ 하면서 즐겁게 보내 버린 케이스이기 때문에 포기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 머리속의 어떤 음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기심이나 열정이 저에게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느 순간 마음이 접어졌어요. 또 세상적인 성공을 원한다면 공부를 계속하면서 명성을 추구해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런 욕망이 없었어요.
사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한 선생님과 엄마의 지도 아래 피아노를 쳐왔는데, 제 피아노책 여백에는 낙서와 그림들이 가득했어요. 그리고 피아노 책 위에 소설책을 겹쳐 놓고 손으로는 피아노를 외워서 치면서 눈으로는 책을 읽곤 했죠. 심지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른 음악을 들으며 피아노를 친 적도 많아요. 아마 김민기씨 노래였을 거예요. 어릴 때 한참 심취해 있었거든요.
그리고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인 인명사전을 끼고 다니면서 헐리우드 고전 배우들의 프로필 같은 걸 줄줄 외우고 다녔어요. 날마다 4~5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힘들 때는 머릿속으로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상상했어요. 그러면 그 시간들을 거뜬히 채울 수 있었거든요. 아무튼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피아노 연습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린시절이 평탄하지는 않았지요. ㅎㅎ
저의 이런 경험 때문에 지금도 어린 아이들에게 일률적인 음악교육을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사람마다 뇌가 다르고 감성도 다르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킬 때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파악하시는게 먼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인연이 다한 것을 미련없이 떠나 보낸 사람의 여여함이랄까.

노래패 사회운동가
늘 생각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사회운동가의 면모가 엿보이는데, 어린 시절에도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지 물어보았다.
“그건 타고난 기질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강철 고집을 가진 기질. ㅎㅎ
미국에 오기 전에는 제가 너무 어려서 어떤 신념체계 같은 건 없었어요. 그저 사람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사회운동이라는 멋진 말이 저에게는 좀 거창하게 느껴져요.
미국에 오기 전에 민주노총 산하의 지역 노래패 활동을 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제가 직접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현장 노동자도 아니면서 노동자 노래패에서 정말 속없이 해맑게 활동했어요. ㅎㅎㅎ
작은 사업장 노조는 돈이 없어서 철야농성이나 집회 때 전문 노래패를 부르지 못해요. 그래서 ‘불러주면 무조건 간다’ 하는 저희 노래패가 아주 바빴지요. 그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사람을 만나서 각자의 삶을 나누고 같이 고민하며 울고 웃던 그때의 경험은 앞으로도 제 삶에서 최고의 가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리 같이 해볼까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조직에 속해 있으니 함께 행사를 기획하기가 그래도 좀 쉬웠겠지만, 이곳 그린빌에는 그런 조직도 없거니와 교민도 별로 많지 않은 곳에서 세월호 추모행사를 기획하려면 사람들을 설득하고 참여를 독려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교민도 많지 않은 작은 동네 그린빌에서 세월호 추모행사를 하면 큰 도시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혹시 남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고, 아무한테나 제안을 하지는 않지요.ㅎㅎ 그렇다고 전도를 하거나 물건을 파는 것처럼 어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에게 다가가지는 않고요. 저는 ‘이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과 같이 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도 좋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 같이 해볼까요?“ 이렇게. 그러면 누구나 ”그래요!” 하지 않겠어요? ㅎㅎ 그리고 꾸준하게 같이 가다보면–그린빌에서 세월호 추모제를 4년 동안 같이 해왔잖아요. 어느 샌가 서로의 든든한 동지가 되어 있지요.”

인생의 성장통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세월호 2주기부터 5주기까지 준비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을까?
“사람의 자의식을 마주할 때인 것 같아요. 어떤 모임이든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가지각색의 자아들의 집합이에요. 하나의 목적 아래 모였으니 일이 술술 잘 풀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요. 그러다보면 상대방이 가진 동기의 순수성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는데, 그럴 때 내 자신의 자의식 또한 불거져 나와서 내가 힘들어져요. 그러면 ‘나를 죽여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이 이런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은 이런 타인과의 부딪힘을 통해 내가 딱딱한 자아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힘들다’는 것은 결국 인생의 성장통이고, 삶에서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힘들어도 부딪히면서도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사람이 있는 곳에 늘 함께
그런데 그린빌 사람들은 조만간 이 좋은 친구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가 남편의 이직으로 인해 정든 그린빌을 떠나 코네티컷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린빌을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참 고마운 곳’이라고 표현했다. 짧은 말 속에 긴 여운이 느껴진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간 후에도 그녀는 지금처럼 사회운동을 계속하며 어디서든 목소리를 내야 하는 자리에 계속 참석할 것인지 궁금하다.
“저의 작은 노력이 누군가의 삶에 기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세월호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그걸 활동이나 운동이라고 말하기엔 거창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늘 사람이 있는 곳에 같이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이 있는 곳에 늘 같이 있을 거라는 그녀의 말이 어찌보면 당연한 말인데 나에게 묵직하게 와 닿는 느낌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이 후회스럽지 않다면 어깨 펴고 당당히 걸으라는 어느 노친네의 등 두드림을 생각하며 그녀를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그린빌 사람들의 마음에 그녀가 늘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