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할머니
평생 김밥을 팔아서 모은 전 재산 6억을 기부한 박춘자 할머니(92)가 김정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린 사연이 공개돼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당시 대통령 내외는 거동이 불편한 박 할머니를 직접 부축하러 나갔고, 영부인의 손을 잡은 박 할머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이날 청와대에서 박춘자 할머니를 만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청와대 초청
지난해 연말 청와대에 초청을 받았다. 아동보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의 홍보대사 자격이었다. 한 해 동안 활발히 활동한 14개 봉사, 나눔 단체의 기관장과 대표자들을 초청해 대통령이 격려하고 상징적으로 기부하는 자리였다. 처음 참석하는 청와대 공식 행사가 기대되고 긴장도 되었다.
일찌감치 경복궁에서 출발하는 청와대행 버스에 올랐다. 초청받은 사람들의 면면이 대단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봉사단체의 대표와 더불어 홍보대사들이 격식을 갖춰 참석했다. 구세군, 월드비전, 적십자, 유니세프 등의 이사장과 TV에서 보던 유명 연예인들이 한 버스에 있었다. 구면인 그들은 각 단체의 올 한 해 활동과 사회적 현안, 덕담을 나누었다. 대의와 선의가 함께하는 낯설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박춘자 할머니
리허설을 마친 후 공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장내 소개와 함께 대통령, 영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공식적이지만 온화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 중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고액 기부자로 참석한 한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대통령, 영부인, 비서실장, 단체의 이사장, 유명 연예인 사이에 앉아 있는 왜소한 체격의 구순 할머니. 그 대비가 너무나 뚜렷해서 마치 영화나 만화 속 장면 같았다.
어느덧 할머니의 차례가 되자 대통령 내외는 직접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축하러 나갔다. 전 재산을 재단에 기부한 분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영부인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모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시대의 성자
할머니는 온전히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당신은 남한산성 앞에서 김밥을 팔아서 번 돈과 자신의 집과 땅을 포함한 전 재산 6억을 기부했다.
단순히 금전뿐만이 아니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당해 가족 없이 살던 할머니는 40년 전부터 길에 버려진 발달장애인을 가족처럼 돌보며 살았다.
고령이 되자 남은 것은 거동이 불편한 몸과 셋방의 보증금뿐이었다. 할머니는 셋방을 뺀 보증금 2천만 원마저 기부하고 거처를 옮겨, 예전 당신이 기부해 복지시설이 된 집에서 평생 돌보던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자였다.
할머니가 청와대에 초청받아 영부인의 손을 붙들고 우는 장면은 어느 드라마 같았지만, 현실이었다. 지극한 현실이라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먹먹한 표정으로 우리는 회담장으로 향했다. 대통령 내외는 할머니를 모시고 선두에서 이동했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랐다.
대통령의 간단한 인사말과 각 단체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자리의 무게에 걸맞은 정돈된 언어들이었다. 소외된 이웃이 있는 봉사 현장과 새로운 나눔의 방향, 발전한 국가 위상과 더불어 베푸는 국가로서의 고민이 이어졌다.
이윽고 영부인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의 발언 차례가 되었다. 모두는 어떤 부채감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80년 전 따뜻한 손
“저는 가난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근근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돈이 없어 배가 고팠습니다. 배가 고파서 힘들었습니다. 10살부터 경성역에 나가 순사의 눈을 피해 김밥을 팔았습니다. 그렇게 돈이 생겨 먹을 걸 사 먹었는데… 먹는 순간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남들한테도 주고 싶었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면 이 행복을 줄 수 있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그 뒤로는 돈만 생기면 남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나누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구십이 넘게 다 주면서 살다가 팔자에 없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내밀어 주시는 손을 잡으니, 갑자기 어린 시절 제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의 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귀한 분들 앞에서 울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80년 전 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기억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 그 손 때문에 모든 것을 남에게 내어주신 할머니, 옆자리의 영부인이 가장 크게 울고 계셨다. 그것은 압도적인 감각이었다.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 또한 치열한 선의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여전히 ‘높은’ 무엇인가가 있었고, 앞으로도 일정 지위의 삶을 영위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따뜻한 손을 나눠주기 위해 자신이 얻은 모든 일생을 조용히 헐어서 베풀었다. 구순이 넘는 육신과 이미 모든 것을 기부했다는 사실 만큼 당신을 완벽히 증명하는 것이 없었다. 그 패배가 너무 명료해 ‘봉사’라는 명목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떤 한 생은 지독하고도 무한히 이타적이라 무섭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것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존재를 직면했을 때 경험하는 경배일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청와대에서 조우한 것은 화려한 건물이나 높은 사람들도 번듯한 회의도 아니었다. 범인으로는 범접하기 어려운 영혼이 펼쳐 놓은 한 세계였다.
출처 : peacewood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