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문화 [영화 칼럼] 인생의 옆길에서 삶을 음미하다

[영화 칼럼] 인생의 옆길에서 삶을 음미하다

0
[영화 칼럼] 인생의 옆길에서 삶을 음미하다
박성윤 캐롤라이나 열린방송에서 ‘박성윤의 영화는 내 인생’ 코너 진행
[email protected]

사이드 웨이 (Sideways, 2004)
감독: 알렉산더 페인
주연: 폴 지아매티, 토마스 헤이든 처치

와인 영화의 명작
와인 애호가인 중학교 영어교사 마일즈는 결혼식을 1주일 앞둔 단짝 친구 잭과 함께 산타바바라의 와이너리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난다.
‘일렉션’, ‘어바웃 슈미트’를 연출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2004년작 ‘Sideways’는 개봉하자마자 많은 비평가들과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다. 특히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와인의 깊은 풍미에 비유하며 관객들을 취하게 한 덕분에 와인 판매량을 급증시킨 영화이기도 하다.

잠시 인생의 옆길로
마일즈는 2년 전에 아내와 이혼했다. 그리고 작가의 꿈을 안고 자신의 소설을 출판사에 보내고 출간 결정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다. 벌써 인생의 절반을 살았지만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과 실패한 결혼에 대해 슬퍼하며 전 부인을 그리워하는 마일즈에게 유일한 삶의 위안은 와인이다.
마일즈의 오랜 친구 잭은 예전엔 드라마 조연으로 잘 나갔지만 지금은 TV 세척제 광고 성우로 전락한 B급 연기자다. 그는 부잣집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실은 장인의 사업을 도와야 하는 부담감과 자신의 타고난 바랑둥이 기질을 더 이상 만끽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1주일 앞으로 다가온 결혼에 자신이 없다. 그래서 마일즈와 잭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행과 와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잭이 그만 옆길로 너무 빠져 버렸다.

와인 애호가 마일즈는 단짝 친구 잭과 함께 여행을 나선다. ©justwatch.com

옆길에서 만난 사랑
이 위기의 중년 남자들은 여행지에서 아침엔 골프를 치고 낮에는 와인을 시음하며 밤에는 고급식당에서 와인과 식사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람둥이 잭은 자신의 결혼을 비밀로 한 채 와이너리에서 시음 와인을 잔에 가득 따라준 열정적인 여자 스테파니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에 바쁘다.
마일즈는 이곳에 오면 늘 들르는 식당의 웨이트리스 마야의 관심을 느끼지만 결국 처량맞게 혼자 시간을 보낸다.

와인과 인생
어느 날 이들 4명은 함께 식사를 하며 더블 데이트를 하게 된다. 평소에는 주눅 들어 있지만 와인 이야기를 할 때 만큼은 눈이 빛나고 열정적이 되는 마일즈와 탁월한 미각의 소유자인 마야는 와인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마야가 마일즈에게 묻는다.
“피노(pinot, 포도의 종류)를 왜 그렇게 좋아해요?”
“글쎄요… 피노는 재배하기 힘든 포도예요. 껍질이 얇아서 온도 변화에 민감하고 빨리 익죠. 카버네 같은 생존자가 아니에요. 아무데서나 자랄 수 있는, 안 돌봐줘도 잘 자라는… 피노는 항상 돌봐주고 관심을 줘야 해요. 오직 인내심과 사랑이 있는 사람만이 피노를 가꿀 수 있죠. 피노의 잠재력을 아는 사람만이 피노의 진정한 맛을 끌어낼 수 있어요. 그러고나면 그 맛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빛나는, 미묘한,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고풍스런 맛이 되죠.”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마일즈와 마야 ©PicsWe

피노를 통해 마일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마야는 알아챘을까? 이번엔 마일즈가 묻는다.
“왜 와인을 좋아해요?”
“나는 와인의 일생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아요. 와인은 살아 있어요. 난 그 포도들이 자라던 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생각하는 게 좋아요. 태양은 어떻게 빛났는지, 비는 왔었는지. 그리고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요. 오래된 와인이라면 그동안 그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도 생각하죠.
나는 와인이 계속 진화하는 것이 좋아요. 내가 오늘 와인을 한 병 딴다면 그 와인은 다른 날에 땄을 때와 다른 맛이 날 거예요. 왜냐하면 와인은 살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맛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복잡성을 갖게 되죠. 정점에 이를 때까지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61년산 와인처럼요. 그러다 정점에 이르면 피할 수 없는 내리막이 시작되죠. 그리고 정점일 때의 그 맛은 정말 끝내주죠.”
마일즈의 진실함에 반한 마야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포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불행의 순간엔 오직 와인
마일즈는 마야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전처 빅토리아에 대한 미련과 자괴감 때문에 마야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전처가 재혼을 한다는 것과 자신의 소설이 출판사에서 거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총체적 불행과 슬픔과 분노를 무엇으로 달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와인뿐! 마일즈는 와인 코르크를 이빨로 뽑아 와인을 퍼부으며 포도 농장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와이너리의 시음와인 항아리를 통째로 들이붓는다. 마일즈는 와인의 맛을 전혀 음미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순간 이렇게라도 미치도록 의지할 것이 있음은 다행이 아닐까?

광란의 파티
한편 마일즈는 자신의 소설에 관심이 있는 마야에게 초고를 건네주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며 같이 밤을 보낸다.
그런데 결혼 소식이 들통나 스테파니아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잭은 코뼈가 내려앉은 상태에서 또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다 결국 그 여자의 남편에게 발각되어 결혼 반지를 넣어둔 지갑마저 잃어버린 채 알몸으로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잭의 코뼈에 대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나무를 들이받아 자동차 사고로 위장한다.
좋은 와인을 많이 맛보고 싶었던 마일즈와 많은 여자들과 즐기고 싶었던 잭의 달콤쌉싸름한 일탈은 이렇게 끝이 나고, 마일즈는 다시 무기력한 삶으로 돌아온다.

절망의 순간에도 와인
잭은 무사히 결혼을 하게 되고, 그의 결혼식에서 마일즈는 전부인인 빅토리아와 재회하게 된다. 함께 와인을 음미하며 즐겼던 그녀를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는 마일드에게 빅토리아는 임신을 해서 더 이상 와인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그 둘 사이를 이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감에 마일즈는 그녀와 다시 만나는 날 마시기 위해 소중하게 보관해 오던 특별한 와인 61년산 샤토 슈발 블랑을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함께 종이컵에 따라 허망하게 마신다.

사랑으로 숙성되는 삶
출판사의 전화를 기다리던 마일즈는 집에 오면 습관적으로 자동응답기를 확인한다. 그러나 자동응답기는 늘 비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메세지가 하나 들어와 있다.
“늦게 연락해서 미안해요. 당신의 소설을 읽었어요. 정말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예요. 출판이 안 되면 어때요. 포기하지 말아요. 계속 글을 써요. 행복하게…….”
자신이 너무도 하찮아서 자살도 못하겠다던 자괴감과 절망 속에 허우적 거리던 마일즈는 결국 마야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시 삶의 기쁨을 느끼며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인생을 음미하다
영화 제목인 sideways는 우리말로 ‘옆길’ 또는 ‘샛길’을 의미하고 속어로는 흠뻑 취하다라는 뜻도 있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렉스 피켓(Rex Pickett)은 이혼과 작가로서의 실패, 그리고 빚더미로 삶의 절망 가운데 자살시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 잠시 쉬어가려고 들른 와이너리에서 사람들과 와인을 나누어 마시며 자신을 치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인생의 여정에 잠시 쉬어가는 샛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향기에 흠뻑 취하는 경험은 때로 우리 삶에 깊은 풍미를 더해준다. 그러니 인생이 힘들고 외로울 때 잠시 샛길로 빠져서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인생을 음미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