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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50대 홀로 빛나도 아름답다, 글로리아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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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50대 홀로 빛나도 아름답다, 글로리아 벨
박성윤
캐롤라이나 열린방송에서
‘박성윤의 영화는 내 인생’ 코너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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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 벨 (Gloria Bell, 2019)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주연: 줄리안 무어, 존 터투로

최고의 여성 주연 영화
칠레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의 각본과 연출로 피노체트 정권 하의 ‘자유’의 의미를 중년 이혼녀의 이야기로 풀어낸 2013년 영화 ‘글로리아’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며 관객들에게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어 렐리오 감독은 다시 2019년에 줄리안 무어(Julianne Moore)를 주연으로 한 헐리우드 버전 ‘글로리아 벨(Gloria Bell)’을 리메이크하였다.
또한 렐리오 감독이 연출한 2017년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각본상에 빛나는 영화 ‘판타스틱 우먼’은 트랜스잰더 여성의 슬픔과 편견의 경험을 탐구한 작품으로, 이 감독의 영화 중심에는 늘 여성이 있다. 최근 그가 리메이크한 영화 ‘글로리아 벨’ 역시 50이 넘은 중년의 이혼녀가 답이 없는 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기꺼이 홀로 빛나는 고독을 선택하며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삶을 즐기는 사람
이혼한지 10년차 되는 50대 싱글녀 글로리아는 낮에는 보험 에이전트로 쉴 새 없이 일하고, 퇴근 후에는 새로운 로맨스를 꿈꾸며 싱글 댄스 클럽에서 젊은 시절 그녀가 즐겨듣던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며 보낸다.
그녀에겐 아들과 딸이 있다. 아이들에게 가끔씩 연락은 하지만 이제는 독립해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자리는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다.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깨어나 문득 쓸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글로리아는 자신의 인생을 되도록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츌근길에 차 안에서 팝송을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한껏 에너지를 높이고, 우울증 대신 웃음치료를 받으며 자신을 힐링한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이 삶의 방식에 익숙하게 안착되어 있다.

중년의 로맨스
어느 날 글로리아는 댄스 클럽에서 최근 이혼을 하고 인생을 바꾸고 싶어 체중감량을 한 아놀드를 만나 다시 강렬한 사랑을 꿈꾸며 그와의 로맨스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거칠 것 없는 싱글인 두 사람의 사랑에 뜻밖의 복병이 등장한다. 아놀드의 전처와 두 딸들이다.
아놀드에게는 성인이지만 여전히 아빠의 경제력에 기대는 두 딸이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존재감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자신만을 챙겨줄 것을 요구하는 이들의 미성숙함을 토로하면서도 딸들이 아빠를 찾는 핸드폰이 올리면 언제나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글로리아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두 딸들에게 쉬쉬하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가족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가정을 떠났다고 하지만, 그의 자아는 여전히 이전 가족들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채 글로리아를 힘겹게 했다.

진정한 자아의 독립
영화 글로리아 벨은 ‘관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머니로서, 전부인으로서, 연인으로서, 친구로서, 딸로서, 주인공 글로리아의 삶은 그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관계의 울타리를 떠난 자유는 오히려 고독과 소외에 가깝다.
글로리아의 아들 생일잔치에 초대된 아놀드는 글로리아의 전남편을 만나게 되고, 글로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가족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행복해 하는 그녀에게 소외감을 느낀 아놀드는 말 없이 그곳을 나가 버린다. 오직 서로만 바라보며 사랑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중년의 사랑이다.
새로운 관계는 이미 맺어진 수많은 관계들과 조합되어야 하며, 그것이 실패했을 때 둘의 관계는 존속되기 어렵다. 아놀드의 미성숙한 태도에 실망하고 화가 난 글로리아는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글로리아의 핸드폰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해대는 아놀드의 끈질긴 사과와 노력에 글로리아는 그를 용서하고 라스베가스로 화해의 허니문을 떠난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 같은 시간. 갑자기 아놀드의 전처가 다쳤다는 전화가 오고 글로리아는 그의 전화기를 스프에 넣어버리며 잊으라고 말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가족을 택하고 만다.
분노와 실망으로 무너진 글로리아는 라스베가스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쓰러지고 결국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러 온다.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비행기표는 제가 살게요.”라고 말하는 글로리아는 안정된 50대 중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서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그를 따라 무작정 스웨덴으로 떠난 자신의 딸처럼 몸은 어른이 되어 독립을 했지만 일생 동안 끊임없이 껍데기를 깨며 성장해야 하는 ‘어른아이’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성숙한 사람, 성숙한 관계
다행히 상처받은 글로리아는 다시 탄력 있게 일어선다. 점점 시력이 떨어지며 중년의 노화를 겪고 있고, 가족과 일상을 공유할 수 없어 외로움을 느끼며, 세상의 편견 앞에 선 50대 이혼녀 글로리아가 어렵게 시작한 사랑마저 실패로 끝났지만 그녀는 인생의 춤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글로리아가 자신의 고독을 미성숙한 관계로 채우려 하지 않는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복잡한 감정과 뉘앙스로 가득한 글로리아의 내면을 탐험해가는 이 영화는 50대 여성의 실존적 고민을 개인이 지닌 존엄과 강인함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성숙한 관계를 맺고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 홀로 빛나도 아름답다.
나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오늘 최고로 빛나고 싶다. 글로리아 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