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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이터널 썬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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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윤
캐롤라이나 열린방송에서
‘박성윤의 영화는 내 인생’ 코너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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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2004)
감독: 미셸 공드리
주연: 짐 캐리, 케이트 윈슬릿

다시 보고 싶은 영화 1위
이 영화의 제목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은 알렉산더 포프(1688~1744)의 시 ‘엘로이자가 아벨라르에게(Eloisa to Abelard)’의 한 구절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흠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에서 가져온 것이다. 서정적인 제목처럼, 기억은 지워져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고 영원한 햇살처럼 비치기를 바라는 관객들에 의해 ‘다시 보고 싶은 영화’ 1위로 꼽히며 개봉 10년만에 재개봉된 최고의 멜로영화 중 하나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로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 작가 찰리 카우프만과 다작의 뮤직 비디오 수상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비쥬얼 스타일리스트 미셸 공드리 감독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발렌타인 데이 아침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남자 조엘은 발렌타인 데이 아침에 출근을 하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직장을 건너뛰고 무작정 롱 아일랜드의 몬탁 해변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그리고 그곳에서 머리를 파랗게 물들인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의 여자 클레멘타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내성적인 남자 조엘과 자유분방한 여자 클레멘타인의 첫 만남 ©Mental Floss

그리고 영화는, 운전대를 붙들고 울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조엘의 모습으로 다시 시작한다.

사랑의 기억을 지우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 사랑하던 오랜 연인이었다. 그런데 우울하고 내성적인 조엘과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인 클레멘타인은 정반대의 성격으로 인해 자주 싸우다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헤어지게 된다. 급기야 클레멘타인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주는 라쿠나 회사를 찾아가 조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린다.
얼마 후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조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조엘은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되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역시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잃어버린 조각’이라는 의미의 라쿠나 회사는 하워드 박사가 두 명의 조수들과 함께 고객의 불행한 기억을 지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프론트 데스크에 앉아 있는 메리가 고객의 시술 스케줄을 관리한다.
“뇌에 손상이 가나요?”라는 조엘의 질문에 하워드 박사는 기억의 감성중추를 제거하면 기억이 소멸되는 원리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손상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깨어날 거라고 말해준다. 마치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것처럼.

몬탁에서 만나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가장 최근 것부터 차례로 지워져 나간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조엘의 기억삭제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조엘의 무의식이 클레멘타인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제발 이 기억만큼은 남겨주세요. 이 순간만은!!!” 조엘이 아무리 소리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자 조엘의 무의식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키기 위한 잠재의식 속에서 투쟁을 시작한다.
공드리 감독은 조엘의 기억이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영화적으로 참신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의 얼굴이 비어 있고, 하늘에서 자동차가 떨어지며, 집이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그러면서 아픈 사랑의 기억마저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한다.
조엘은 삭제되는 기억속에서 클레멘타인을 지키려고, 급기야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감춰두었던 어린 시절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그곳에 클레멘타인을 숨기려고 한다. 수치스러운 기억을 담대하게 꺼내서라도 사랑을 지키려 한 조엘은 이 과정을 통해 늘 위축되어 있고 성장하지 못했던 자신의 자의식을 스스로 치유하게 된다.
그러나 조엘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클레멘타인과 연결된 최초의 기억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 기억이 사라지기 직전, 둘은 진심을 담은 작별인사를 나눈다.
“사랑해.”
“몬탁에서 만나.”

다음날 아침 조엘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이 모두 지워진 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어난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다가 갑자기 충동적으로 몬탁 해변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그곳에서 그는 역시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해변을 거닐고 있던 클레멘타인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래도 괜찮아
한편 하워드 박사를 남몰래 흠모하던 메리는 어느 날 하워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와 키스를 나누는데, 그 장면을 박사의 아내가 목격하게 된다. 하워드와 메리는 황급히 달려가 용서를 구하지만 아내는 힘없이 돌아서며 메리에게 말한다.
“너는 이미 저 남자를 가졌었어…….”
메리는 예전에도 자신이 하워드를 사랑했으며 유부남과의 사랑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감정이 또다시 재현되는 것을 경험한 메리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 그들이 서로의 기억을 지웠음을 알려주게 된다.
이들은 메리가 보내준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자신들이 서로에게 질려서 헐뜯고 싸우다가 헤어졌음을 알게 된다. 이별을 예감한 클레멘타인은 “우린 또 이렇게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게 될 거야.” 하며 떠난다. 그러자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괜찮아.”

Okay. 그래도 괜찮아. ©victor hugo Vasquez

이미 사랑과 이별의 진흙탕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는 조엘의 용기는 그의 자의식이 치유되고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고 자아가 성장하여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그런데 이렇게 나의 의지로 치유되는 상처도 있지만 때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도 있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라쿠나 회사에서 기억을 지우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왕년에 잘 나갔던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는 트로피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고, 반려견이 죽어 슬픔에 빠져 있던 사람도 있다. 그리움은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멈춰지는 것이 아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의 기억을 지운 후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느낀 이유 역시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메리는 기억을 지우는 일을 하는 하워드 박사와 라쿠나 회사를 자랑스러워하며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 삶에 망각이 필요한 이유는 망각이 아픈 상처를 잊고 우리의 삶을 더욱 명징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억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무의식이 원하는 바가 발현된 착각과 재해석이 덧입혀진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생존 본능이다. 이렇듯 망각과 기억은 날실과 씨실처럼 얽히고 설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노근리 사건 등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을 연구하는 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당시 생존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의아한 점이 있었는데, 이분들과 인터뷰를 해보니 누구 하나 특별한 기억이 없이 평이하더라는 것이다. 잊고 싶은 트라우마적인 기억은 이렇듯 뇌에서 망각으로 전환되고 재구성되어 다시 기억된다.
‘운명의 상대는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애절한 연애 신화 덕분일까. 복잡한 프레임과 심오한 주제로 두 번 이상 봐야 이해가 된다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2015년 BBC에서 주관한 미국영화 멜로 장르 1위를 차지했다.

서로 ‘다름’으로 인해 서로에게 끌리지만 결국은 그 ‘다름’으로 인한 성격 차이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지게 되는 연애의 아이러니. 그러나 그 처음의 맹목적이고 설레던 감정은 지울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아 다시 반복되고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