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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사랑과 음악으로 만들어낸 작은 세계,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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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사랑과 음악으로 만들어낸 작은 세계,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
박성윤
캐롤라이나 열린방송에서
‘박성윤의 영화는 내 인생’ 코너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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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 2000)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주연: 존 큐잭, 이벤 히엘, 잭 블랙, 팀 로빈스

음악 매니아를 위한 영화
풍부한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익살스러운 유머까지 갖춘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닉 혼비(Nick Hornby)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는 그의 다른 작품 ‘어바웃 보이(About a boy)’나 ‘피버 피치(Fever Pitch)’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남성주의적인 문화 이면에 가려진 남성 정체성의 이해와 미성숙한 자아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부터 클로징 크레딧에 이르기까지 15개의 음악 트랙이 사용되며, 음악광인 혼비의 팝뮤직에 대한 개인적 취향이 영화 곳곳에 깊숙이 배어 있어 음악 매니아 관객들에게 더한 재미를 선사한다.

음악에 대한 수다
주인공 랍(Rob)은 시카고 다운타운의 ‘챔피온십 비닐(Championship Vinyl)이라는 중고 레코드 가게의 주인이다. 그가 자신의 아파트에 소장하고 있는 수천 개의 LP판을 알파벳이나 연대순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특정한 순간에 들었던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그는 그렇게 음악으로 자신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었다.
음악은 그의 언어였고, 그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가 행복했다. 덕분에 그는 걸어다니는 팝음악 백과사전이 되었고, 음악에 대한 관심은 거의 강박적인 수준이다.
이 중고 레코드 가게에 원래는 일주일에 3일 고용이지만, 갈 곳이 없어 매일 나오는 동료이자 친구 딕(Dick)과 배리(Barry)가 있다. 자신만의 작은 세계에 있을 때 행복한 이들에게 갈 곳이라고는 사실 이곳뿐이다.
그들은 팝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천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딕은 약간 수줍고, 배리는 다소 냉소적인 성격이었다. 그들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뜨내기 손님에게는 LP판을 팔지 않으며, 심지어 음악적 견해가 다른 손님을 내쫓기도 한다. 그리고 랍과 함께 끊임없이 각 상황에 맞는 노래 “TOP 5” 순위를 매긴다. 이별한 사람을 위한 노래 TOP 5, 장례식을 위한 노래 TOP 5, 헤어진 연인을 위한 노래 TOP 5 …….

음악이 먼저일까, 불행이 먼저일까?
그러던 어느 날 랍은 삶의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오래 사귀던 여자친구 로라(Laura)가 그에게 결별 선언을 하고 떠나버린 것이었다. 발전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였다. 랍은 나즈막히 읊조린다.
“음악에는 실연, 슬픔, 소외, 고통 그리고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 내가 불행해서 그런 음악을 듣는 걸까? 아니면 그런 음악을 들어서 내가 불행해진 걸까?”
로라가 떠난 후 자기연민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랍은 갑자기 그동안 자신에게 가장 상처를 준 예전 여자친구 TOP 5를 정하고,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 이들을 찾아간다. 자신이 이유 없이 차였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랍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았던 자신의 일방적인 태도를 깨닫게 된다.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
한편 로라는 이안이라는 나이 많은 남자와 같이 지내게 된다. 로라를 좋아하는 이유 TOP 5를 만들며 그녀를 그리워하던 랍은 그 소식에 심한 질투심에 휩싸이며 로라가 이안과 잠자리를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 심하게 집착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다른 여성과 쉽게 잠자리를 가지며 외부의 유혹에 방어할 마음조차 없어 보인다.
14살 때 강렬한 첫키스로만 기억하고 있는 첫사랑과, 스킨쉽을 허락하지 않아 헤어졌던 학창시절 여자친구, 그리고 지금 로라의 섹스 여부처럼, 랍은 로맨스에 대한 환상과 스킨쉽에 무게를 둔 남성적인 연애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랍은 장례식에 참석해 로라를 만나게 되고, 슬픔에 빠져 있는 로라를 위로하며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자신을 깨닫는다. 장례식이 끝나고 서로 교감을 나눈 뒤 그녀는 랍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서로 사랑하자
이 영화는 랍의 내면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영화다. 자신의 강한 욕망과 욕구가 지배하는 미성숙한 단계의 남성이 상대의 마음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게 되는, 한 여자의 남자로 변해가는 여정이다.
영화는 로라가 랍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 둘의 재결합으로 끝난다. 둘은 랍의 비전 없는 미래 때문에 헤어졌지만, 그들이 재결합하게 된 이유는 그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랍의 모습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단지 누구나 거쳐야 하는 성장의 고통을 지나왔을 뿐.
랍의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편협한 사회성은 그의 특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 세상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변화해야 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본질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와 이해였다.
성장통을 앓으며 껍질을 깨고 나온 랍은 여성들에 대한 자신의 환상을 버리고 로라와 현실의 삶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며 로라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배리가 ‘소닉 데쓰 멍키(Sonic Death Monkey)’라는 밴드를 결성해 마빈 게이(Marvin Gaye)의 ‘Let’s get it on(사랑합시다)’을 부르며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인다. 한 남자의 러브 스토리와 음악에 관한 수다가 더해진 코미디 영화 ‘하이 피델리티’는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뮤지션들의 음악이 관객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재미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