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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삶] 시집가는 딸에게 – 임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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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삶] 시집가는 딸에게 – 임문혁
딸아, 이제 너의 시를 완성해다오. ©minhojungmin.com

시집가는 딸에게

외할머니 시집오실 때
외할머니 어머니는 딸 품속에
조약돌 하나 넣어주셨단다
돌이 말하면 비로소 너도 말하렴
그때부터 외할머니는 돌이 되어 입을 닫으셨단다

우리 어머니 시집보내실 때
외할머니는 딸 품속에
모란꽃잎 자수를 넣어주셨단다
모란이 하는 말을 따라서 하렴
그때부터 어머니는 모란 입술로 꽃말 따라 하셨단다

이제 네 차례가 왔다
네 품속에 무얼 넣어 보낼까?

시 한 편 곱게 적어 넣어준다면
네게서 새록새록 시가 피어날지도 모르는데
시처럼 노래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딸아, 이제 네가 시를 완성해다오

작가의 말
이 시는, 인간 특히 여성의 삶과 말, 언어를 매개로 삶을 엮어가는 존재의 표현과 소통, 그리고 언어를 통한 삶의 형상화라는 시 등 여러 가지를 아울러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순종과 인내와 희생의 삶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래서 전통사회에서는 딸을 시집보내면서 귀머거리 3년, 눈멀어 3년, 벙어리 3년이라는 경구를 주입시켜 보냈다고 합니다.
이 시의 외할머니는 시집오실 때 품속에 어머니가 넣어준 조약돌 하나를 품고 와서 그때부터 돌이 되어 입을 닫으셨다고 합니다. 말의 위험성을 철저히 경계하신 것이지요. 그런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시집보내면서 돌 대신 모란꽃잎 자수를 넣어 주셨지요. 돌 벙어리에서 향기로운 꽃 입술이 되게 하신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제 딸이 시집을 갑니다. 그 애 품속에 무얼 넣어 보내야 할까요? 아파트 열쇠요? 고급 승용차 키요? 거액의 예금 통장이요? 오랜 고민 끝에 이런 결정을 합니다.
삶의 깊은 진실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짙게 스며든 시 한 편을 곱게 적어 넣어준다면, 딸에게서는 새록새록 시가 피어날 거야. 그 애는 시처럼, 노래처럼,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거야. 이제 시인은 간절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면서 시 한 편 곱게 적어 품속에 넣어 보내기로 합니다. 시집가는 딸이 이제 하나의 소중한 존재로 피어나고 자기의 삶을 시처럼 아름답게 가꾸어 완성해 주기를 당부하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임문혁
시인, 교육학박사, (전) 진관고등학교 교장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귀.눈.입.코』 등이 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