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
‘내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경계선적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나 불안증, 우울증 등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이 경험하는 깊은 무기력감(Helplessness)과 절망감(hopelessness)을 한마디로 함축한 표현이다. 그들은 ‘내 상황이 과연 나아질까? 내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나에게 과연 희망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우울감과 회의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희망을 찾아보려 이리저리 환경을 바꿔보고, 직장이나 교회를 옮기며 주위 사람들을 바꿔봐도 묘하게 늘 비슷한 문제가 반복된다. 다른 직장, 다른 교회,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문제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외로움, 소외감, 열등감, 실패감, 분노, 인간관계의 문제들은 환경이나 사람들을 바꾸어도 비슷한 패턴이 다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되니 스스로 점점 지쳐간다. 다 포기하고 싶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잔인한 세상을 탓하며 사람을 멀리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이 등을 돌리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심한 말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선의로 이들을 돕고자 했던 주변 사람들에게도 점점 무력감이 찾아온다. ‘내가 옆에서 아무리 도와준들 과연 저 사람이 변할까?’라는 회의감에 휩싸이게 된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을 완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갈망과 의존성
어린 시절부터 30여년을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J씨는 최근 정신과 의사로부터 경계선적 성격장애의 가능성을 시사받고 상담소를 찾았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지난 20년간 우울증 치료를 위해 인지치료, 전기치료, 정신역동치료 등등 온갖 종류의 모델을 바탕으로 오랜 상담치료를 받아왔다. 직장을 잃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자신을 먹여 살리고 계시는 부모님마저 돌아가실까봐 극단적인 두려움에 시달렸다. 자신의 무능을 수도 없이 탓했고, 그 괴로움과 실패감을 잊으려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에 취해 심하게 주사를 부리는 그의 옆에는 결국 아무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기 안의 뿌리깊은 우울감과 외로움, 절망감을 어쩌지 못했던 그는 몇 번의 자살시도를 했고, 그런 끝에 다시 한번 새로운 상담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J씨는 늘 우울감에 젖어 있는 자신이 싫어 계속 변화를 갈망했다. 상담자든, 부모든, 친구든, 누군가가 자신의 우울감을 단번에 없애주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변증적 행동치료라는 또 다른 상담기법이 과연 자신을 도울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회의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변증적 행동치료(DBT)
변증적 행동치료(DBT, Dialectical Behavior Therapy)는 경계선적 성격장애를 돕기 위해 리네한(Linehan) 박사가 발전시킨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을 제시하는데, 바로 ‘수용(acceptance)’과 ‘변화(change)’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담치료 과정에서 우리는 흔히 변화에만 초점을 맞춘다. 우울증이나 불안증 등의 증상을 단번에 해결하고, 내 성격의 단점을 완전히 없애 버림으로써 실패자로 살아온 삶을 통째로 갈아 엎어 버리고자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모순점은 먼저 나 자신에 대한 수용(받아들임)이 없이는 변화에 필요한 힘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없으면 변화의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내가 가진 성격에 단점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있음을 알고 “I am okay”라고 스스로 말해 주는 것이다. 넘어졌을 때 그럴 수도 있다고 자신을 용서하고, 잘하고 있을 때는 애쓰고 있는 자신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이다.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과 증상들에도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그것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예민한 성격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울한 느낌은 누구나 겪는 감정으로,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슬픔을 느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된다. 불안감 역시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불안하지 않으면 긴장하지 않으니 자신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미움은 대부분 사랑이라는 감정과 공존하고 있다.
이처럼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면 그것의 긍정적인 역할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안에 담긴 보석을 발견하게 되고,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과정은 건너뛸 수도, 남이 대신 해줄 수도 없다.
수용과 변화
수용과 변화의 공존, 그 둘의 균형이라는 개념은 변증적 행동치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셨다.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우리가 똑똑하거나 잘나거나 혹은 뭔가를 이루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아셨고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모든 허물을 대신 지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그 주님이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그에 걸맞게 살라고 도전하신다. 그리고 세상 끝까지 나아가 제자를 삼으라고 격려하신다.
그 일을 혼자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수용과 변화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셨다. 우리의 구원도 치유도 바로 그분 안에 있다. 십자가에 모든 치유의 모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