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는 눈
우리가 무언가를 관찰하고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관여한다. 관찰이 그저 관찰로 끝나는 일은 드물다. 옷 하나를 볼 때도 우리의 생각에 판단이 끼어든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보는 사람에 따라 옷의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주일에 사모가 편안한 옷차림으로 교회에 왔다. 어떤 성도에게는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섬기고, 부엌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적합한 옷일 뿐이다. 그런데 이 똑같은 옷이 어떤 성도에게는 시험이 된다. 사모의 옷차림에서 예배를 경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모는 모름지기 깔끔한 정장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싸 보이는 옷은 안 된다. 이처럼 옷도 그냥 옷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 된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도 우리는 수도 없이 다른 각도에서 판단한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을 그냥 사건으로 지나치지 않는다. 거기에 저마다의 해석과 감정이 수반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그저 빨간색일 뿐이다. 그런데 똑같은 빨간색을 보고 어떤 사람은 사랑과 열정을 떠올리고, 어떤 사람은 너무 요란하고 경박하다는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피와 빨갱이라는 단어를 연상한다. 이처럼 하나의 색깔도 판단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비난의 근거가 된다.
각자의 필터
이런 사고 패턴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성격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판단의 속도와 양에 있어서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판단은 어느새 비판과 비난으로 발전하고, 비난은 당연스레 정죄로 이어진다. 하나의 사건을 보고 판단에서 정죄로 이어지는 생각의 진행이 유독 빠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생각의 길로 접어든다.
예를 들어, 말할 때 상대방의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그저 눈을 잘 마주보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그 행동을 보며 우리는 별별 생각을 다 한다. 나를 피하려고 한다거나, 나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뭔가 숨기는 것 같아 의뭉스럽고, 혹시 뒤로 딴 생각을 하는지 의심도 든다. 심지어 자존감이 낮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보는 사람의 감정과 경험에 따라 그 사람은 무례하거나, 의뭉하거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가 날 보고 웃으면, 내 기분에 따라 그 웃음은 반가움이 되기도 하고, 비웃음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에 순식간에 자신의 감정과 경험이 개입되고, 재빠르게 수많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남편이 집에 와서 아내에게 “오늘 뭐 했어?”라고 물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그저 일상적인 질문을 건넸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그날 아내의 기분에 따라, 혹은 이전의 경험에 따라,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많아’라고 들리기도 하고, 반대로 ‘하루 종일 집구석에서 뭘 했길래 집안 꼴이 이 모양이야?’라는 비난으로 들리기도 한다. 나의 감정과 경험이라는 필터가 그 사건의 색깔을 달라 보이게 만든다.
겸손 VS 학대
판단의 개입은 외부의 사건이나 다른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수많은 판단들이 아주 쉽고 빠르게 내려진다.
집안 청소를 하는 날인데 청소를 미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아휴, 나는 왜 맨날 이렇게 게으를까?’ 어느 날은 직장에서 꼭 해야 할 일을 깜빡했다. ‘아, 나는 너무 멍청하고 칠칠맞아.’ 내가 아는 사람이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가면 나를 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저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지나, ‘나는 역시 인기가 없는 사람이야.’라는 자아비판으로 나아간다. 새벽기도를 가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늦잠을 잔 날은, ‘나는 왜 똑바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하나님도 이런 나를 미워하실 거야’라며 자신을 정죄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7:2)’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아무도 이 말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의 생각은 순간순간 수도 없이 많은 비판을 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 그 결과 우리도 남에게 비판을 받겠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비판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 속에 비판과 비난이 많이 섞여 있을수록 남에게도 잔인해지고, 자기 자신에게 누구보다 더 잔인해진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기학대일 뿐이다.
판단 없이 보라
우리의 생각에서 비판과 비난을 빼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비판과 비난이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도 하지 않으신 비판과 정죄를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한단 말인가? 한 인간으로서의 일천한 경험과 좁은 소견,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감정이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그걸 근거로 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과 정죄의 돌팔매를 던진단 말인가?
그러니 매일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내 생각을 비추어보자. 단순한 사건에 내 감정을 덧붙여 판단하고 비난하지 않았나 돌아보자. 관찰은 그저 관찰로, 사건은 그저 사건으로 판단 없이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