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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칼럼] 상처, 그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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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칼럼] 상처, 그 이후의 삶
상처에서 회복해 다른 사람을 돕는 치료자가 될 수 있다. ©social workblog.org
심연희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RTP지구촌교회 사모
[email protected]

말하기 힘든 상처
상담을 하다보면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게 된다. 어떤 때는 그 아픔을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고 쓰린 상처들이다. 자신이 어릴 때, 세상을 잘 모를 때, 그리고 대항할 힘이 없을 때 일어난 일들이 태반이다. 마치 바이러스에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후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정신적인 문제들이 오히려 한동안 더 심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울, 불안, 분노의 감정들이 새삼스레 치밀어 올라오고, 다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담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 자살을 하거나 상담을 금세 그만두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직 그 상처를 들여다볼 만큼 마음이 단단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상처에서 새 살이 돋게
상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은 치유 과정에 있어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종기가 났을 때 아픈 곳을 꽁꽁 싸맬수록 증상이 악화되고 깊어진다. 상처난 곳을 일단 열어야 공기가 통하기 시작하고 어디서부터 치료를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게 된다.
그런데 고름 덩어리를 열고나서 아프다고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흉하고 냄새나는 상처가 지속될 뿐이다. 뿌리 깊은 종기를 치료하려면 피부를 째고 고름을 짜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약을 발라야 한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새 살이 돋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자기 잘못 때문이든 남의 잘못 때문이든 삶에서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바로 그곳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발견해야 한다. 차라리 죽고 싶었던 사람이 이제 새롭게 다시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 회복과 새로운 삶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 상담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
상담소를 찾은 S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과자였고, 마약중독자였고, 아내와 딸을 버린 가장이었다. 그리고 나이든 남자와 함께 사는 동성애자였고, 정부가 지급하는 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실직자였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깊은 상처를 준 가해자였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삶도 피해자의 아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운동도 잘했던 S씨는 장학금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그가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갑자기 돌아가셨고, 두 달 뒤 어머니가 자살하셨다. 그리고 4개월 뒤 하나 남은 동생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6개월 동안 모든 가족을 하나씩 차례로 잃은 그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 후 몇 년 간 아버지가 남긴 꽤 많은 재산을 파티와 마약, 향정신성 약물을 구입하는 데 탕진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 때문에 친구들만은 자신을 떠나지 않게 하려고 그들에게 돈을 물 쓰듯 썼고,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은 얼마 안 가 바닥이 났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병원들을 돌아다니며 향정신성 약물을 처방받았고, 급기야 의사의 싸인을 위조해 마약성 약들을 사모았다. 그런 행적이 들통나 그는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출소 후,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을 잘 돌봐주었던 남자를 따라나서며 동성애자 선언을 하고 아내와 어린 딸을 버렸다. 그의 파트너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다. 덕분에 S씨는 파트너의 으리으리한 집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S씨에게 그 파트너는 잃어버린 아버지였고 구원자였다.
그런데 화려한 파티가 있었던 주말 아침, 잠에서 깬 S씨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고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황을 물어보려고 파트너의 방에 들어간 S씨는 그 파티에 있던 남자들이 자신에게 약을 먹이고 성폭행을 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해 즐기고 있는 파트너를 발견했다.
그는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와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의사에게조차 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전과자에 실직자였던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그에게 몹쓸 짓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죄를 모두 덮을 수 있는 만큼 큰 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삶을 끝내려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렇게 엄청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상처를 딛고 일어난 사람들
몇 번의 자살을 시도하면서 실려간 병원에서 그는 그룹 및 개인 상담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신과 같은 인생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아픔을 딛고 상처 입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한 상담사, 간호사, 의사들을 보게 되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마음과 눈을 열기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자살이 아닌 다른 목표가 생겼다. 자신을 살리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명석한 머리와 말솜씨를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데 쓰지 않았다. 상담을 공부했고, 자신처럼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자원봉사를 계속 하다보니 어느 새 그를 알고 도움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러다 나중에는 감옥, 경찰서, 중독자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미국의 유명한 사회복지단체에서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다시 새로운 시작
너무나 힘들었던 2020년 한 해가 끝났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아픔과 상실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걷기를 포기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상처를 껴안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다른 이들을 조용히 돌아보고 회복하게 하는 위로자로 거듭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는 이런 상처가 내 가족과 우리 사회에 이어져 내려가지 않도록 나의 세대에서 그 사슬을 끊어내야 할 책임이 있다. 깊고도 쓰라린 상처를 딛고 일어나 함께 회복할 수 있도록 격려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때로 깊이 상처받고 그 고통으로 삶이 무너지지만, 상처가 우리의 끝은 아니다. 다시 한 번의 새로운 시작과 회복, 그것이 우리 인생의 결론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2021년이라는 또 한 해가 주어진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