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조절
미국에서는 분노 때문에 사고가 생겨 감옥에 가면, 의레 Anger Management 그룹에서 치료를 받거나 수업을 들으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한국에서도 ‘묻지마 살인’ 등 분노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린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 조절에 관심이 많다. 분노를 잘 다스려 가능하면 완전히 없애 버리고 싶어한다. 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 곤란한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하며 분노라는 감정을 한 쪽 구석으로 치워 버리려 애쓴다.
지금까지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분노 뒤에 숨은 감정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이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분노는 중요한 감정
분노의 감정이 과거 우리의 상처에서 기인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상처를 없애고 분노의 뿌리를 뽑아 버릴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첫 단계는 의외로 분노를 없애는 것과 거리가 멀어보인다. 왜냐하면 분노 조절은 분노하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니타 팀페는 <분노는 나의 힘>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를 내는 모습은 모범적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 분노는 기쁨이나, 슬픔, 두려움과 같이 아주 정상적인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공동생활에서 터부시되고 있다. …… 그 결과 우리는 분노에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른다.”
저자는 분노가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나아가 분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분노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분노와 행동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고, 분노를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니타 팀페는 감정을 조절하는 방식에 있어 부모의 모델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한다. 아기들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운다. 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가 아기의 신호를 계속 무시하거나 처벌하면 아기는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다. 반면에, 폭력적인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는 자신의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저자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표출하지 못한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노를 해결하지 않고 몰아냈기 때문이다.”
불공평한 인생
B씨는 동네 사람들과 자주 싸우고 관공서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자기가 차를 대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차를 대면 욕을 하며 달려들었다. 내 차례인데 다른 사람이 먼저 서비스를 받으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쳤다.
B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분노는 현재 상황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출생부터가 ‘불공평’했다. 그의 부모는 전쟁을 거친 세대였고, 아버지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는 둘째 부인의 아들로 태어나 다른 친척의 호적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명석했지만 아버지의 우선순위가 되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학비를 받아오라고 ‘큰집’에 보내진 그는 아버지의 첫째 부인과 배다른 형제들의 냉대와 수모를 당하며 마당에 하염없이 서 있어야 했다.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과 억울함으로 가슴 깊이 새겨졌다. 그 후로 그는 자신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거나 누군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의 안에 있던 상처받은 아이가 계속해서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다 알라
심리학에서는 ‘성인 아이’라는 개념으로 상처받은 과거의 자신을 설명한다. 과거에 상처받은 상황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한 아이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 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그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상처와 분노를 받아들이는 데서 치유가 시작된다. 분노하는 내 안의 그 아이를 불러내고 그 아이의 감정을 차분히 받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부모에게 듣지 못했던 말들을 스스로에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 다 알아…, 화 날만도 하지.”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우리의 잠재된 분노가 스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도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시편 기자들이 수도 없이 분노와 억울함, 두려움, 슬픔을 쏟아 놓을 때 다 들으셨다. 그리고 우리가 쏟아내는 분노와 아픔, 슬픔을 다 안다고 하신다.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 이미 ‘체휼’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회복을 경험한다.
분노의 조절은 먼저 분노하는 자신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분노는 밀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다독여 주어야 한다. 수용을 거친 분노는 훨씬 더 순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