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폭발
C는 상담소를 들어서면서부터 씩씩거렸다.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집안을 다 뒤집어 놓고 왔단다. 몇 년째 졸업을 못하고 질질 끄는 남편이 꼴도 보기 싫었다. 빨리 학위만 마치면 좋은 직장에서 얼마든지 모셔갈 텐데, 공부한다는 이유로 최저시급을 받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자신도 옷가게에서 일을 하지만, 날마다 옷가지를 정리하고 계산대에서 잔돈을 거슬러 주는 일에 신물이 났다. 자기 삶은 왜 맨날 이도 저도 아닌지 한숨만 나고, 자신을 한층 업그레드 시켜줄 것 같던 남편이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게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날은 작정을 하고 달려들어 남편이 보던 책을 죄다 찢어 버렸다.
늘 어중간한 아이
아내의 입장에서는 무능하고 답답해 보이는 남편에게 다정하게 대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상황만 놓고 보면 C의 행동은 도가 지나치고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C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가 매사에 화가 나는 이유는 남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7남매 중 딱 중간으로 태어났다. 공부를 아주 잘한 것도, 그렇다고 아주 못한 것도 아니었다. 눈에 확 띄게 예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었는데 그다지 좋은 직장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는 곳도 아니었다.
C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어중간”이었다. 특별히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다. C는 그 점이 진저리치게 싫었다. 자신이 늘 어중간하고 특별하지 않다는 느낌은 그녀에게 분노를 촉발시키는 방아쇠(trigger)가 되었다.
특별할 것 없던 자신의 삶을 확 바꿔줄 것 같았던 남편은 기대만큼 그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남편이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면서, 자신을 향하던 분노가 이제 남편에게 퍼부어졌다.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처럼 그녀 안에서 이글거렸다. 남편은 이따금 그 분노의 마그마를 쏟아낼 빌미를 제공하곤 했다.
귀하고 특별한 존재
우리가 쏟아내는 분노에는 여러 갈래의 뿌리가 있다. 겉으로는 알기 힘든 숨겨진 이슈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인정(Recognition) 받고자 하는 갈망이다. 자신의 존재감이나 능력을 인정받는 것 만큼 신나는 일도 없다. 나를 알아주는 상사가 있으면 목숨을 받쳐 충성하기도 한다. 반대로 무엇을 해도 인정받지 못한 경험은 시한폭탄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별것도 아닌 작은 일이나 엉뚱한 상황에서 분노가 터져나온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인정과 격려에 목마르다. 어린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는, “엄마, 아빠, 이것 봐. 나 좀 봐봐”이다.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끊임없이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때 부모들은 관심어린 눈으로 반응하며 아이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킨다. 남의 아이들이 다하는 말도 막상 우리 아기가 시작하면 드디어 천재가 났구나 싶다. 두세 발자국 걷다가 넘어져도 “아이구, 잘하네” 하며 박수를 치는 가족들 때문에 아이는 신이 나서 일어나 또 걷는다. 아이는 이런 관심과 인정을 먹고 키가 크고 자신감도 자란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 즉 있는 그대로의 내가 충분히 귀하고 소중하고 멋지고 사랑스럽고 특별하다는 의식이 좌절되거나 박탈되면 상처를 받기 시작한다.
분노의 뿌리
우리는 모두 인정을 갈구한다. 그래서 얼짱, 몸짱이 되고 싶고, 뇌가 섹시하고 싶고, 특별한 달인이 되고 싶다. 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상처받고 분노한다.
남편이 운전을 하는데 옆에 앉은 아내가 “운전 좀 천천히 해”라고 하면 남편은 버럭하며 소리친다. “뭘 천천히 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가고 있는데 웬 잔소리야?”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안전운전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남편에게 이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인정과 신뢰 부족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칭찬할 줄도 몰랐던 부모님에게 상처 받았던 아픔이 오버랩된다. 방금 들은 아내의 잔소리보다 훨씬 더 뿌리 깊은 분노의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분노의 뿌리를 이해하는 작업은 분노조절의 첫 걸음이다. 내가 별것도 아닌 일에 엄청나게 화가 날 때는 뭔가 실수를 한 상대방의 잘못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내 안에 예전부터 숨겨진 화약고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나 자신을 잘 성찰하고 이해해야 분노 아래 숨겨진 진짜 이슈를 구분해 낼 수 있다. 문제의 원인이 지금 일어난 이 일인지, 과거의 다른 일인지 가려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분노하는 진짜 원인을 알아차리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문제를 집채만한 문제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누가 나에게 별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가 한 달 동안 삐질 일인지, 5분간 섭섭하고 말 일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전보다 조금 덜 화내고, 조금 짧게 화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