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그녀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지 10년이 되었답니다. 처음엔 미국인 남편과의 문화 차이, 사고방식 차이 등으로 겪는 일상이 재미있어서 친구에게 수다 떠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제가 이민 와서 경험하고 실수하면서 배우게 된 미국의 생활 정보들을 공유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계속해 왔어요.
이 블로그 덕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블러프턴에 살면서 좋은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 이곳 워싱턴주로 이사 와서도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중 한 분이 ‘친절한 그녀(블로그 닉네임)’님이랍니다.
친절한 그녀님은 작년 9월부터 미국 우체국에 취직해서 아주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신데, 지난 5월에 시간이 맞아 급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우체국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다 보니 빡센 스케줄과 새벽 출근, 잦은 오버타임도 거뜬히 해내는 그녀가 너무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저도 9월 새 학기가 되어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가면 그 시간에 마트 알바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둘째 제제가 태어난 후로 집에서 아이들만 돌보고 집 인테리어나 하던 제가 다시 미국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뭔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자신이 없었어요.
7년 전, 미국에 오자마자 얼마 안 돼서 크로거 마트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 보고, 알바를 구해 일했던 그 자신감은 아마도 미국 생활을 아무것도 몰랐기에 용감하고 패기 있게 도전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전업주부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지금은 자신감을 잃어 선뜻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저 막연히 ‘9월이 되면 뭐라도 일을 다시 시작해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죠.
이런 제 속마음을 얘기하니 친절한 그녀님이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말했어요.
“아니, 왜요? 언니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언니 마트 알바 이야기 보면서 얼마나 힘을 얻었는데요! 언니가 미국에서 씩씩하게 마트 알바 구하고, 일하는 모습에 힘을 얻어서 ‘나도 일을 시작해보자’ 하는 용기를 내고 알바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 언니라면 할 수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언니는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이 말을 듣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그렁그렁~~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동이 솟구치더라고요. 그녀의 이 말 덕분에 그 날은 제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답니다.
운명 같은 싸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라는 말에 의욕이 솟구치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충만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치 운명처럼 제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바로 새로 오픈하는 “S 매장”의 구인광고였습니다! S 매장의 그랜드 오프닝 사인과 함께 구인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더라고요.
장 보러 갈 때 늘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그곳에 백화점과 함께 S 매장이 생기는 줄도 몰랐고, 구인 광고가 붙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제 가슴속에 긍정 에너지가 만땅으로 채워진 바로 그! 순! 간! 그 광고를 보게 된 것이 저에겐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답니다. 게다가 S 매장은 제가 일해 보고 싶은 뷰티 관련 매장이기도 하고, 또 그랜드 오프닝을 앞둔 새로운 매장이니 저도 오픈 멤버로 함께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요. 물론, 지원한다고 제가 채용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열정과 현실 사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해보자’라는 의욕에 너무 신나서 집에 돌아왔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아이들을 마주하니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 아이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나는 일을 할 수가 없지……. 그래서 애초에 9월부터 일을 하려고 했던 건데…….’ 타협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쉽지만 그 신나던 마음도, 운명 같은 싸인도 살포시 접어두고 9월까지 기다려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그 구인광고가 자꾸 눈에 아른거리고, 나도 새로 오픈하는 매장의 오픈 멤버가 되어 일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아이들 방학 생각이 그 욕심을 덮어버리고……. 그러기를 반복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서 뭔가가 꿈틀대며 그 욕심을 비집고 올라와 ‘지원한다고 합격하는 것도 아닌데, 일단 경험 삼아 지원이라도 해 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밤을 새우다시피 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 제가 내린 결론은, ‘일단 지원해 보고, 방학 때는 일을 못하지만 내가 정말 맘에 들고 뽑고 싶다면 9월 이후 빈 자리가 생겼을 때 나를 불러주겠지! 당장 채용하지 못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마음으로 지원해 보자. 혹시 3개월 사이에 그만두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이 정도면 제가 친절한 그녀님에게 받은 용기와 에너지가 얼마나 차고 넘쳤는지 아시겠죠?ㅎㅎㅎ
이력서 준비
그렇게 해서 그날부터 이력서를 준비하기 위해 며칠 동안 레쥬메 쓰는 법을 검색하고, 레쥬메 양식을 고르고, 내용을 수정하고 또 수정해서 완성했습니다. 이력서를 쓰다 보니 저의 공백기가 얼마나 길었는지 다시 한번 깨닫고 깜짝 놀랐네요. 마지막 직장 생활이 12년 전인데, 그 이후에 이력서에 써 넣을 게 없더라고요. 그러다 번뜩 생각난 것이 미국에 오자마자 크로거에서 8개월 알바한 게 생각나 채워 넣었더니 공백기가 6년으로 줄어들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물론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미국 유아식> 책도 냈고, 지금은 미국집 인테리어 책도 준비하고 있지만, 제가 지원하려는 곳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이력서에 쓸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공백기가 6년 정도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드디어 지원을 하기 위해 온라인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매장의 지원 페이지가 오픈되어 있었는데 더 이상 오픈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우째 이런 일이!!! ㅠ.ㅠ 아마도 제가 이력서를 준비하는 며칠 사이에 이미 다 충원이 되었나봐요. 너무너무 안타깝고 아쉬웠어요.
그.러.나. 이렇게 포기할 제가 아니죠. S사의 메인 홈페이지에 들어가 지원서를 작성하고 그곳에서 제 지원서를 지점으로 넘겨주기를 바라며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연락은 없었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제가 지원하고 싶은 지점을 검색하며 계속 체크해 봤습니다. 그렇게 한 열흘쯤 지났을까? 이메일로 구인광고 메일이 왔더라고요. 그래서 그 지점을 다시 검색해보니 지원 페이지가 다시 오픈되어 있지 뭐예요??? 왔구나!!!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이번 기회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 너무 신나서 곧바로 지원서를 작성하고 이력서도 첨부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에 뚜둥!!! 서류 심사에 합격했으니 인터뷰 스케줄을 예약하라는 메일이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인 오후 1시로 예약하고 그날부터 면접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면접 준비
먼저 S사의 인터뷰 질문을 검색해 출력한 뒤, 제 상황에 맞는 대답을 준비해 말해 보는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다른 도시에 있는 S사의 매장에 찾아가 직원들의 유니폼과 헤어스타일, 화장법, 신발까지 꼼꼼히 체크했습니다. 직원들은 검정색 옷에 검정색 신발을 신고 있더군요. 그래서 집에 오는 길에 저도 검정색 셔츠와 바지, 그리고 신발도 한 켤레 샀어요. 합격한 것도 아닌데 마음은 이미 합격한 기분으로 돈 쓰며 설레발을 치고 있었죠. ㅎㅎㅎ 마지막으로 집에 와서 손톱에 젤네일도 예쁘게 발랐어요. 표범 무늬까지 정성껏 그려 넣어서요. (위 사진)
면접 당일
그리고 드디어 면접날이 되었습니다. 애들 키우며 살던 시골 아줌이 면접 준비를 하려니 화장하고 머리 손질하는 데만 1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혹시 운전하고 가는 동안 마스카라가 번져서 너구리가 될까봐 매장 근처에 가서 바르려는 세심한 계획도 세웠죠. 그리고 제가 쓴 유아식 책도 가방에 넣었습니다. 혹시나 이 책으로 뭔가 저를 어필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요.
그렇게 20분 정도면 가는 거리를 나름 조금 여유 있게 40분 전에 출발했습니다. 모든 준비가 완벽한 듯했고, 기분도 좋아서 다 잘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그렇게 룰루랄라 노래도 부르며 잘 가다가, 이쯤이면 거의 도착했겠다 싶을 때!
‘매장이 여기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으잉? 내가 지나쳤나??? 아닌데… 하지만 더 가면 그 매장이 있을 곳이 없는데… 아, 지나쳤나보다!’ 하며 길이 헷갈리기 시작했고, 급히 차를 돌려서 되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계속 직진을 해도 그 매장이 나오지 않고, 더 가도 그 매장이 있을 만한 곳도 없었어요.
“아, 맙소사! 큰 일 났네!!!”
저는 갑자기 당황하고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어요. 면접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거든요. 차를 세우고 휴대폰으로 매장을 검색해 보았지만 아직 오픈하지 않은 매장이라 주소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고 심장도 벌렁벌렁하면서 패닉 상태가 되었습니다. 면접 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무리 검색해도 주소를 찾을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치겠더라고요.
결국 차창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는데 그 사람도 모른대요. ㅠ.ㅠ 그런데 고맙게도 그분이 다른 분에게 물어서 위치를 알려주시더라고요. 그렇게 대답을 듣자마자 미친듯이 운전해 겨우 도착해 시계를 보니 1시 3분. 세상에!!! 인터뷰에 지각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제 자신이 너무 싫었고, 이미 인터뷰를 망친 것 같아 너무 속상하고 막 울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휴대폰 진동이 막 울리길래 일단 차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받으려고 허겁지겁 차에서 내린 후 가방을 여니 진동이 멈췄더라고요. 그날 면접 볼 매니저분에게서 온 전화였는데, 그 전화도 받지 못하다니……. 완전, 완전, 완.전.히. 오늘 인터뷰는 망했다는 불길한 징조였어요.
그렇지만 도착은 했으니 일단 매장에 들어가 제가 왔다는 것은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고등학교 체력장 때의 100미터 21초 기록을 갱신할 기세로 전력질주해 매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매장 문 옆에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담배를 피면서 저를 훑어보며 인사를 건네더라고요.
“How are you doing?”
아직 매장 오픈 전이라 디스플레이 공사가 한창이었고, 담배 피는 분들 복장이 작업복 같은 차림이라 현장 노동자들 같았습니다. 하지만 일단 달리기를 멈추고 최대한 밝게 웃으며, “I’m pretty good! Thank you! How are you?” 하며 진짜 반가운 척, 하이톤으로 대답했어요. 그리고 서둘러 매장 안으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오늘 인터뷰가 있었는데 조금 늦었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데, 제 뒤통수에 대고 누군가가 말하더군요.
“면접 보러 왔어요? 그럼 같이 가요. 내가 매니저예요.”
맙소사!!! 그 현장 노동자 같던 분이 제가 지원한 S 매장의 매니저였던 겁니다!!! 저는 그냥 매장 공사하시는 분인줄 알았거든요. 인터뷰에 늦어서 마음이 급했는데 그 와중에 달려가면서 대충 답하지 않고 멈춰 서서 밝게 대답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휴~~ 인사 잘해서 진짜 다행이다!!!’ 하며 안도했지요.
그렇게 그분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제가 인터뷰할, S사를 관리하는 K 백화점의 총책임 매니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 늦어 당황하며 차에서 내리고 있을 때 저에게 전화를 걸었던 바로 그분…이었죠. 출발 전까지만 해도 좋은 예감으로 가득했던 인터뷰였는데, 지각을 하는 바람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터뷰 현장…… 이후 인터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세요? 인터뷰 후기는 다음 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미국 생활 정보, 일상, 문화 차이, 여행기 등을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이자 <엘리네 미국 유아식> 책의 저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