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있었다
저희가 작년 3월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집을 팔고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워싱턴주 모제스 레이크까지 이사를 올 때는 나름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었어요. 이곳에 완전히 정착하려던 것은 아니고, 남편이 이곳에서 5년 정도 커리어를 쌓고, 저도 내년에 둘째가 유치원에 가게 되면 풀타임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니까 이 회사에 취직을 해볼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미리 눈여겨 본 포지션도 있었지요.
모제스 레이크는 아무것도 없는 깡시골이지만 여기서 5년만 꾹 참고 지내면 저희 삶이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이곳에 오자마자 새 집도 짓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작년 12월 중순에 새 집에 입주를 했고, 짐 정리가 다 끝나지도 않은 3월 즈음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남편의 재택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죠.
불길한 예감
그러다 4월에 2층 욕실의 누수를 발견하게 되었고, 건축회사와 옥신각신하며 어영부영 한 달을 보내고 5월 중순이 되었죠. 그런데 그 즈음부터 미국 여기저기에서 계속되는 외출금지령 때문에 문을 닫는 중소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대기업에도 정리해고 바람이 불고 파산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들의 그룹채팅에서 그 즈음에 제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모제스 레이크에 코로나 확진자가 2명(?) 정도 나온 상황이었는데 친구들이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올까 걱정 된다고 했고, 저는 그 말 끝에, “나는 남편 회사에 정리해고가 시작될까 걱정이 돼.” 라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코로나 때문에 남편이 일하고 있던 항공업계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금지되거나 여행객이 급감한 상황에서 항공업계도 좋을 리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곧 CEO와 전 직원이 함께 하는 온라인 미팅이 있어. 아무래도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아…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아마도 정리해고를 시작하겠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편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올해 안에 끝내지 못할 경우 회사에 어마어마한 손실이라 어떻게든 올해 안에 끝내려고 전 직원이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래서 정리해고가 있더라도 남편은 그 프로젝트와 앞으로 있을 새 프로젝트의 핵심 멤버이니 운이 좋으면 정리해고를 피해갈 수도 있겠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죠.
며칠 후 남편이 온라인 미팅에 들어갔고, 저는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 중이었는데 미팅을 끝내고 나온 남편이 얘기 좀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때 정수리부터 스며드는 서늘한 기운…
코로나의 직격탄
“6월 1일부로 이곳 지사 전체를 잠정적으로 폐쇄한대.”
왓?!?!?! 일부 정리해고가 아니라, 이곳 모제스 레이크 지사 자체를 닫아버린다는 거였어요. 올해 안에 끝내야 했던 프로젝트는 모든 비행 테스트가 취소되면서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되었고, 그러면 이 지사가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일본에서 온 주재원들의 월급과 체재비를 지급하면서까지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 거죠. 6월 1일부로 지사는 폐쇄하고, 모든 주재원들은 6월과 7월에 걸쳐 본국으로 돌아가고, 현지 직원들은 모두 정리해고 절차에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이것은… 마치 코로나한테 양쪽 불꽃 싸다구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는데, 사실이 아닐 수만 있다면 양쪽 뺨을 얼마든지 더 들이대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아주 조금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일이 우리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랬지요.
아, 그때부터 온갖 걱정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대륙을 횡단하는 이사를 했고, 5개월에 걸쳐 새 집을 지었고, 입주한지 이제 겨우 5개월밖에 안 됐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하게 되면 재취업을 해야 하는데, 모제스 레이크는 진짜 깡시골이라 이곳에는 남편이 일할 만한 직장이 없어서 다른 지역으로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 집을 다시 팔아야 하는데, 이 회사가 문을 닫으면 사람들이 다 이곳을 떠나야 하니 집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질 테고, 그럼 집값도 떨어지겠죠. 사실 그 시점에 모제스 레이크에 있는 다른 항공회사가 이미 정리해고를 시작했기 때문에 주택 시장에 매물이 계속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미국 전체에서 정리해고가 일어나고 있어서 재취업 시장의 상황도 아주 안 좋았기 때문에 남편이 얼마나 빨리 새 직장을 구할 수 있느냐도 문제였어요. 아직 이삿짐도 다 안 풀었는데 또 짐을 싸고 이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였고, 내가 원하는대로 예쁘게 지은 새 집에서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집을 팔아야 한다는 것도 너무 속상하고, 집을 팔아야 한다면 빨리 팔아야 하는데 하필 2층 욕실에 누수가 생겨서 당장 팔 수도 없는 상황이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죠.
이곳 지사를 재오픈할 때까지 모제스 레이크에서 버텨보자는 생각도 했지만, 남편은 기약 없는 시간을 무모하게 기다리는 건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은 일단 푹~ 쉬어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일들로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정신 챙기고 하나씩 해결해 가면 될 테고, 지금은 무엇보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고 열흘 뒤면 당장 무직자가 되는 와플이 아부지의 가슴에 난 스크래치부터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배운 여자답게 말했지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 못한 거잖아. 당신 탓이 아니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일단 한 석 달 동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맛있는 거 먹고, 게임 실컷 하고. 당신만 정리해고된 거 아니고, 당신 보스, 동료들도 다 같은 상황이잖아. 그러니까 서로 만나서 얘기도 하고 정보도 얻고 하면 위안이 될 거야. 그리고 그 후에 본격적으로 이력서를 돌려보자. 안 되면 내가 알바라도 뛰지 뭐.”
그런데 남편은 매일매일 맛있는 거 잘~ 챙겨먹고, 게임도 실컷 하면서도 밤에 잠은 못 자고 이리저리 뒤척뒤척, 그리고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취업 사이트를 뒤지며 방황을 하더라고요. 이러니 잔소리를 할 수도, 위로를 할 수도 없었어요.
그리고 남편 회사의 정리해고 발표 후에 주재원으로 와 있던 일본인 친구들도 급작스레 이삿짐을 싸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이렇게 되니 제 삶이 갑자기 그냥 난장판이 된 것 같았어요. 정리해고, 새집 정리와 되팔기, 남편의 재취업, 또는 저의 파트타임 취업, 그리고 그동안 정들었던 친구들과의 갑작스런 이별… 저~ 멀리 중국 우한의 폐렴이 미국 시골에 사는 우리 가족의 삶까지 이렇게 흔들어 놓을 줄은 몰랐어요.
이 위기를 저와 와플이 아부지는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코로나 정리해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미국 생활정보, 일상,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