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호의 기회
요즘 미국에서는 사상 유래 없는 낮은 이자율 덕분에 집을 사려는 바이어가 절대적으로 많고, 그에 비해 집을 팔려는 셀러는 적다보니 너무하다 싶게 셀러 마켓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집값을 높여서 오퍼해도 떨어지기 일쑤고, 오퍼해서 계약 상태에 들어갔다고 해도 셀러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집의 하자나 보수 요구도 어지간하면 바이어가 감수해야 하죠. 정말… 내가 갈아주던 주인 전답을 공짜로 받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철저하게 을이 되어 집주인 눈치를 봐야 하다니 어이가 없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지금 안 사면 이렇게 좋은 모기지 이자율로 집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니 철저히 ‘을’이 되어 갑에게 맞춰서 일단 마음에 드는 집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요. 제가 늘 하는 말이지만, 사랑이나 쇼핑이나 똑같은 것 같아요. 가질 수 없으면 더 가지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최선을 다하고, 내 꺼 되면… 그 다음부턴 내 맘대로!^^
첫 번째 바이어
그래서 오늘은 제가 집을 팔면서 셀러로서 겪은 바이어에 대한 경험을 공유할까 합니다.
제가 작년 9월에 리얼터 없이 집을 팔면서, 리스팅한지 40분만에 첫 쇼잉을 하고 곧바로 첫 오퍼를 받아 더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수락해 집을 팔았답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그렇게 빨리 집을 팔게 된 이유는 비공식 쇼잉 때 만난 첫 번째 바이어 때문이었어요.
리스팅 전에 저희 동네 페이스북에 집 사진을 올렸다가 비공식 쇼잉 요청이 하나 들어왔는데, 그 커플의 남자분이 브로커(자기 브랜드로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였어요. 그리고 브로커답게 정말 집값을 너무 후려치더라고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아마도 제가 리얼터 없이 혼자 집을 팔고 있으니 부동산 판매에 대해 잘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일단 한번 던져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리스팅 가격보다 더 올려서 오퍼해도 집을 팔까 말까한 핫한 셀러 마켓이라는 걸 부동산 전문가인 본인이 모를 리가 없었을텐데, 집값을 후려치다 못해 그 가격에 저희 집의 모든 새 가구와 인테리어까지 다 놓고 가라는 황당한 요구를 해왔을 리가 없었겠죠.
집을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오퍼 하나 하나가 중요하지만, 이런 식으로 셀러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오퍼는 저의 오기를 발동하게 만들더라고요. ‘집이 안 팔리더라도 당신한테는 안 팔아!’ 하는 오기 말이죠.
두 번째 바이어
그분들이 다녀가고 30분 후에 리스팅이 되었는데, 바로 첫 쇼잉이 잡혔고, 그 두 번째 바이어로부터 오퍼를 받았습니다.
일단 바이어가 방문했을 때 왠지 오퍼를 받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쇼잉을 하는 동안 집을 비워줘야 하니까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 집 안에 카메라를 켜 두었고, 나중에 녹화된 영상을 봤거든요. 일단 저의 취향과 바이어의 취향이 굉장히 비슷했어요. 그분도 모던 팜하우스 스타일의 집을 좋아하셨고, 데코하는 스타일도 저랑 비슷했거든요.
아무튼 쇼잉하는 동안 제가 아끼던 집을 그분도 너무 마음에 들어하시는 게 느껴졌고, “여긴 ○ ○ 방 하면 좋겠다. 여긴 □ □ 방!” 하며 아이들 방까지 미리 정하며 이 집에서의 미래를 그려보고 있는 걸 보니, 오퍼가 오면 그냥 이분들께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번째 브로커 커플에게 맘이 상해서 ‘너만 아니면 돼’ 하는 심정이었거든요.
그리고 오퍼를 받고 나서 제가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겠다고 하니까, 바이어가 인스펙션 컨틴전시 빼고(집에 하자가 있는지 검사를 안 하거나, 혹은 하자가 있어도 그걸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지 않겠다는 것) 디파짓도 더 올려주겠다는 거예요.
사실 저희 집은 욕실에 누수가 있어서 바닥을 다시 뜯어내고 재공사를 했잖아요. 그래서 컨틴전시를 뺀다는 조건에 솔깃했지만 제가 욕실 공사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고,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바이어가 이 부분을 더 확실히 확인하고 넘어가길 바랐어요. 새 집이라고 샀는데 또 누수가 생기면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저를 원망하겠어요?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재공사할 때 제가 그렇게나 우겨서 방수 테스트까지 했거든요.
그래서 오퍼는 지금 받은 그대로도 좋으니 인스펙션은 철저히 하고, 다른 내용은 더 수정할 것도 없이 바로 수락하겠다고 했지요.
이렇게 기분 좋게 거래가 성사되었고, 저도 이사를 해야 해서 짐을 줄이려다보니 새로 산 세탁기와 드라이어는 팔고 이사 가서 새로 구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바이어에게 혹시 구입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봤어요. 잔디 깎는 기계도 부피가 커서 이것도 같이 물어봤는데, 세탁기와 드라이어만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혹시 오피스룸에 있는 선반을 놓고 갈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 선반도 작년 4월에 구입한 새 선반인데 4개에 120불에 구입했던 거라서 100불에 팔겠다고 했더니 OK.
그러고 나서 바이어의 리얼터로부터 문자가 왔어요. 바이어가 저희집 인테리어를 매우 좋아해서 데코된 상태 그대로 사고 싶어하니 혹시라도 팔고 싶은 게 있으면 사진과 가격을 보내달라고요. 어머나, 내 집을 정말 예뻐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뻤고,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내 집을 사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부피 크고, 다시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팔고 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요.
말조심
그리고 며칠 뒤, 인스펙션이 있던 날! 바이어 커플과 리얼터, 인스펙터 2명이 저희 집을 방문했어요. 저희가 집을 비워준 후 그들은 약 3시간 반 정도 머물렀고, 다녀간 뒤에 녹화된 영상을 보았습니다. 바이어는 전에 쇼잉할 때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지 못했다며 정말 인스펙션하듯이 창문 하나하나 다 열어보고 서랍 하나하나 다 열어보더라고요. 그리고 주방 캐비넷을 열어보고는 소스류를 lazy susan(회전판) 위에 올려 놓은 걸 보고는, “집주인이 쫌 스마트한데? 나도 이렇게 해야지!”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저희집 팬트리(식품 저장 공간)를 열어보더니, “와~ 이 집주인 정리해 놓은 거 봐봐!!! 끝내주네!!!” 하더라고요.
저는 ‘역쉬 내 취향 = 니 취향이지?’ 하며 기분 좋아지려는 찰나!!! 팬트리 안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바구니에 쓰여진 이름표를 하나씩 읽다가 갑자기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리얼터와 자기 남편을 부르더라고요. “여기 이거 봐봐!!! Sea weed(김)래… 누가 김을 이렇게나 많이 먹어? 심지어 김 한 종류만 바구니 하나 가득이야!!!”
순간, 와… 이 기분, 아시려나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능욕당한 이 기분!!! 나에게는 없어서 못 먹는, 게다가 한국에서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귀하디 귀한 김인데… 아이들 밥 반찬으로 먹일 조미김도 있었고, 김밥김도 있어서 바구니 한 가득인 건데… 자기가 안 먹는 음식이라고 저렇게 막말을 해도 되는 건가요? 팬트리에 그렇게 쌓아 놓고 사는 사람이면 그 음식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건데… 지금 바이어는 자기집이 아니라 그 음식을 즐겨 먹는 셀러의 집에 잠시 와 있는 거잖아요? 내 집에 와서 내가 먹는 음식을 역겹다고 하는 것도 기분 나쁜데, 심지어 이 사람 저 사람 불러 모아서 그걸 구경시키며 비웃다니!!!
저는 기분이 상해도 완전 상해 버렸어요. 그녀의 남편은 그걸 보고 피식 웃었고, 리얼터는 그냥 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요. 집에 카메라가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었고, 심지어 바이어가 카메라 위치를 옮기기까지 했지만,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 리얼터뿐이었나봐요.
바이어는 그날 저희집 거실에 있는 인테리어 데코 용품인 벽시계, 거울, 촛대, 벽난로 양쪽에 걸려 있던 철제 장식물 등을 그대로 다 자기에게 놓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리얼터는 이미 셀러에게 놓고 가고 싶은 게 있으면 사진과 가격을 보내 달라고 말해 놨으니 연락을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개뿔이나 놓고 갈테다!!!
내 집에 들어와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비웃어 놓고, 나의 인테리어 용품들을 놓고 가라고? 그렇게는 못하지!!! Sea weed 능욕 사건 이후로 저는 다시 오기가 발동했고, 그 바이어에게는 완전히 냉담해졌습니다. 이후 인스펙션 결과가 나왔는데 새 집이라 아주 사소한 것들이 리스트에 있더라고요. 환풍기 필터를 좀 더 높은 단계의 필터로 교체해주기, 히터 주변에 먼지가 많으니 ‘전문가’를 고용해 청소해주기, 페인트 터치업, 창문이 뻑뻑하니 부드럽게 고쳐 놓을 것 등등…
그런데 저는 이미 바이어에게 마음이 단단히 상한 상태였어요. 계약까지 된 마당에 집을 안 팔겠다고 말할 배짱은 없었고, 이런 걸로라도 좀 튕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단 저희집이 새 집이라 빌더 워런티가 있으니 빌더에게 요구할 것들은 다 요청해 두었고, 나머지는 이렇게 답했어요.
“필터는 리스팅 직전에 교체했으니 3개월 후에 직접 교체하시고, 히터의 먼지는 안전상의 문제나 구조상의 문제가 아니니 해결해줄 의무 없음”
만약 김 능욕 사건이 없었다면… 필터 까짓거 제가 새로 사다가 교체해줬고요, 히터 먼지도 전문가는 아니어도 제가 직접 티끌 하나 없이 청소해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젠 그런 요구 들어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제작년에 집 팔았을 때는 바이어에게 카드도 쓰고 선물도 준비해서 집에 남겨 놓고 왔었어요. 이번에도 카드와 키프트 카드를 준비하려고 했었죠. 저랑 인테리어 취향도 비슷하고, 저희집 벽시계가 너무 갖고 싶다고 쇼잉할 때 몇 번이나 말하길래 그 벽시계 살 수 있는 가게의 기프트 카드를 벽시계 금액만큼 넣어서 선물로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내 김을 모욕한 자! 나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 하며 바이어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뒤끝을 보여줬습니다.ㅎㅎㅎ
그러니 여러분! 혹시 집을 사러 다른 집을 보러 다니신다면 그 집과 집주인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해 주시고, 설사 집의 결함이나 집주인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하더라도 그 집 안에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집주인이 나중에 녹화된 영상을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 집이 듣고 있잖아요. 집도 자신을 험담하는 사람을 새 주인으로 맞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미국 생활정보, 일상,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 <엘리네 미국 유아식> 저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