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 경보
때는 바야흐로 첫째 와플이를 임신해서 콩알만 하던 시기. 그러니까 입속으로 들어간 모든 음식이 저의 소화기간을 거치지 못하고, 분노의 역류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입덧이 정말 한창일 때였죠. 남들처럼 밥 냄새도 못 맡아서 밥도 못한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니 하루 종일 아무런 의욕이 없고, 힘도 없고, 또 속이 울렁거리다 보니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들어서 음식에서 거의 손을 놓았던 때였어요.
그 당시 저희는 일본에서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고맙게도 저녁식사를 자기 혼자 알아서 해결하더군요. 주로 먹었던 음식은 편의점에서 파는 계란 샌드위치와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이었어요. 그런데 얄궂게도 제 후각은 다른 냄새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데 유독 남편이 저녁으로 먹는 그 계란 샌드위치의 삶은 계란 냄새와 아몬드 초콜릿의 아몬드 냄새가 너무도 싫은 겁니다. 삶은 계란의 노른자 냄새는 마치 닭의 겨드랑이털 냄새 같고(아니 뭐 맡아본 적은 없지만요… ㅡ.ㅡ;;;), 아몬드 냄새는… 뭐랄까… 아몬드 썩는 냄새(역시나 맡아본 적은 없고요) 같았으니 참 이상한 일이었죠.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마누라한테 밥도 못 얻어 먹는 불쌍한 남편은 자신의 유일한 양식의 냄새에 유독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저 때문에 제가 있는 공간을 피해서 저녁식사를 하느라 고생을 좀 했답니다. 제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주로 주방 구석을 서성이며 저녁을 먹고 쓰레기까지 완벽하게 처리한 뒤 양치를 하고 나서야 제 옆으로 올 수 있었죠.
그런 생활이 계속 되던 3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3월에는 커플에게 아주 중요하고도 의미 깊은 날이 있지 않습니까? 그 뭐시냐!!! 일명 ‘하얀 날(White Day)’이라고나 할까요?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도 주고, 초콜릿도 주고, 선물도 주고 하는 뭐 그런 가슴 따뜻해지는 훈훈한 날 말이죠.^^
그 날을 며칠 앞둔 주말에 남편과 장을 보러 갔는데 남편이 초콜릿 재료들을 카트에 막 담지 않겠어요?
‘앗! 이 남자가 화이트 데이를 앞두고 임신한 마누라에게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줄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호호호… 역시, 임신을 하니 대우가 다르긴 다르구나!!! 이럴 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예의지~ 암!!!’
그렇게 저는 남편의 쇼핑 목록에 대해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장을 보고 왔습니다.
가내 초콜릿 공장
집에 돌아온 남편은 주방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하더군요.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초콜릿을 녹일 때 중탕하는 것도 알고, 고 녀석… 아니, 고 남편 참… 기특하구만~!!! 열심히 중탕한 초콜릿을 베이스로 깔더니 또 뭔 정체불명의 사탕 같은 것을 녹여서 그 초콜릿 위에 바르기 시작합디다? 그러더니 그 위에 아몬드를 정성스레 하나씩 하나씩 오와 열을 맞춰 올리더군요.
오오~ 그냥 초콜릿 중탕해서 틀에 부어서 식히는 그런 식상한 초콜릿 따위는 만들지 않겠다는 남편의 굳은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무슨 3단 초콜릿이라도 만들려는 건가?!?!?!’ 물론, 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괜히 주방을 왔다갔다 하며 물도 좀 마시고, 쓸데없이 냉장고 문도 열어보고 하면서 남편이 잘하고 있나 곁눈질로 살펴봤어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볼, 남편의 정성이 드음~뿍~ 들어가 있을(?) 수제 초콜릿인데 실수로 망치지 않도록 제가 감시를 잘해야 했거든요.ㅎㅎㅎ 아몬드 냄새에 민감한 임신한 아내를 위해 초콜릿 토핑으로 아몬드 냄새를 가려주는 남편의 이 세심한 배려~!!! 비록 만드는 과정은 쫌 허접해 보였지만 그 끝은 분명 창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남편은 벨기에 초콜릿 장인 같은 눈빛으로 아몬드를 한 알 한 알 직접 올린 3단 수제 아몬드 초콜릿 작업을 끝내고 살포시 냉장고에 넣어 놓더니 이내 모든 기력이 쇠진한 듯, 쇼파가 꺼져라 풀석 주저앉더군요.
‘그래, 고생한 당신! 좀 쉬어라!!! 남편에게 이런 수제 초콜릿 받아보는 여자도 드물 거야~!!!’
아몬드 냄새가 약간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남편이 이렇게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먹다가 토하는 한이 있어도 맛있게 먹어줘야겠다 다짐하며, 저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초콜릿이 빨리 굳기를 기다렸습니다. 같이 영화 한 편을 땡기고 나서 남편이 갑자기 초콜릿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급히 냉장고로 달려가더니 잠시 후 주방에서 ‘탁! 탁!’ 소리가 나더군요. 아마도 완성된 초콜릿의 컷팅 작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아~~~ 가슴이 두근두근!!! 남편이 만든 수제 초콜릿을 받게 될 행복한 순간이 기대~ 기대~!!!
그리고는 드디어!!! 남편의 수제 초콜릿이 남편과 함께 제 눈앞에 짜잔~ 하고 등장했습니다!!!!
이…… 이…… 거……….
아무리 봐도 이것은…… 중학교 시절 역사책에서 보던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가 아니던가?!?!?!?!?!
수제 뗀석기 초콜릿
수제 초콜릿인 것도 맞고, 나름 장인 정신으로 정성들여 만든 것도 맞는데, 생긴 건 왜 이 모양인지… 컷팅의 실패였나, 레시피의 실패였나, 그도 아니면 애초부터 뗀석기였나??? 참…… 유구무언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어요. 정말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더군요. ㅠ.ㅠ 남편의 정성을 생각하면 우와~ 하며 감탄 좀 해주고 칭찬도 해주며맛있게 먹어줘야 하는데, 이건 뭐 입에 넣었다간 무슨 사단이라도 날 것처럼 생긴 초콜릿이라니….
그래서 저는 정말 너무나 미안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심정으로, 남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기야, 너무너무 미안한데, 나 이거 아몬드가 들어 있어서 못 먹겠어. 알잖아, 나 임신하고 아몬드 냄새에 민감한 거…… 미안해~~~”
(그래도 100% 솔직하게 말하긴 미안해서 입덧 핑계를 ㅡ.ㅡ;;; )
그러자 남편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겁니다.
“알아, 자기 아몬드 못 먹는 거! 이거 내가 먹으려고 만든 거야!!!”
뭣이라고라고라고라~????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그의 마지막 말…
내가 먹으려고 만든 거야!!!
내가 먹으려고 만든 거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뭐? 이거 자기가 먹으려고 만들었다고??? 나 주려고 만든 게 아니라?!?!??!?!?”
“자기 아몬드 못 먹는데 왜 자기 주려고 이걸 만들어? 일본 편의점에서 파는 아몬드 초콜릿은 너무 비싸! 매일 밖에서 사먹는 것보다 내가 이렇게 한꺼번에 만들어 놓고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만들었어!”
그런 거… 였어…? 가슴 훈훈해지는 화이트 데이에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라??? ㅠ.ㅠ 참나, 지가 먹으려고 만든 거였다네요. 어쩐지!! 내가 냄새도 못 맡는 아몬드를 정말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빽빽히도 넣는다 했더니, 지가 먹으려고 아몬드를 그렇게 많이 넣었던 거네요!!!
휴우~ 그렇게 저는 김칫국 먼저 마시다가 사레 들린 불쌍한 임산부 꼴이 되어버렸답니다. ㅠ.ㅠ 그리고 제 남편의 머릿속 달력에는 화이트 데이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 뭐 원래 미국에는 화이트 데이가 없긴 하지만요… 발렌타인 데이 때 남녀가 서로 선물을 주고받거든요.)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구석기 시대 도구로나 사용할 것 같은 저 뗀석기 초콜릿을 먹는 것보다야 차라리 안 먹는 게 훨씬 낫겠다며 저를 위로했더니, 뭐 즉시 힐링이 되더라고요. ㅋㅋㅋ
기술의 진화
구석기 시대에 뗀석기가 간석기로 진화했듯이, 남편의 뗀석기 초콜릿도 점점 진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3단 초콜릿이 애초부터 그에게 너무 무리한 꿈이었음을 깨닫고는 단순한 아몬드 초콜릿부터 다시 도전하기 시작하더군요. (구토 주의!)
그런데 레시피 단순화 작업을 거치고 컷팅 기술도 계속 연마하더니, 초콜릿 만드는 기술이 정말 날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이런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자신’을 위한 수제 초콜릿 만들기 작업에 계속 도전했습니다.
이렇게 도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인간 승리를 이루어 내고야 말았으니, 그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3단 3색 아몬드 수제 초콜릿 만들기에 드디어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쯤에서 정말 박수를 좀 쳐주셔야 합니다. ㅋㅋㅋ 초콜릿을 초콜릿이라 부르지 못하던 실패와 좌절을 딛고 진정한 3단 3색 수제 아몬드 초콜릿을 만들어 냈으니 말입니다. 다만, 이 모든 노력이 임신한 아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가 먹으려고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은 절대로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미국 생활정보, 일상,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 <엘리네 미국 유아식> 저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