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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생활기] 남편의 발렌타인 데이 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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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생활기] 남편의 발렌타인 데이 서프라이즈!
보이는가? 꽃봉오리 가운데에 새겨진 저 의미심장한 하트가!!! ©스마일 엘리

남편의 은밀한 취미생활
2월에 발렌타인 데이를 보내며 몇 년 전 케케묵은 에피소드 하나가 불현듯 떠오르더군요. 때는 2월 초. 자신에게 취미생활이 없다며 징징대던 남편이 갑자기 차고에 틀어박혀 나무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당시 저희 집 차고에는 전 주인이 남기고 간, 다 썩어서 장작으로나 쓰면 딱 좋을 나무 판때기와 각목 몇 개가 있었습니다. 그냥 갖다 버릴까 했더니 남편이 나중에 쓸 데가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차고에서 그렇게 한 2년쯤 방치되어 있었죠.
아참, 그 사이에 그 나무들로 화분 스탠드(?)를 하나 만들긴 했네요. 사실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혼자 뚝딱뚝딱 하더니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니 굼벵이의 재발견이랄까? 구르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덤블링도 하네??? 뭐 그런 느낌이었죠. 당연히 칭찬도 한 사발 드~음뿍 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화분 스탠드 이후로 한 1년쯤 지난 어느 날, 남편이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너무 지루하다며 뛰쳐 나가더니 차고에서 지잉~지잉~ 하며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넘게 지잉~지잉~ 하더니 온몸에 나무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쓰고 나타나 샤워한다고 안방 욕실로 걸어가면서 온 집안에 하얀 나무 먼지를 흩뿌려 놓더군요.
도대체 뭘 만드는 건지 궁금해서 남편이 샤워하는 동안 살짝 차고에 갔다가 기절할 뻔!!!! 세상에나……, 나무 먼지가 검은색 자동차를 하얗게 덮은 것도 모자라 차고에 있던 신발들이며 바닥까지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얗더라고요. 아우 진짜!! 이걸 어떻게 다 치우려고!!!! 혹시 이 느낌 아시려나요? 아들이 뭔가 기특한 일을 해서 응원해주고 싶은데, 뒷감당이 안 되는 느낌? 마치 남편이 요리해준다고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만드는데, 온갖 조리 도구들을 다 꺼내서 싱크대에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 있고, 가스렌지 주변에 음식물이 눌어붙어 범벅이 되어 있는 상황, 딱 그런 느낌이었죠.
이걸 보고 잔소리를 해서 남편이 새로 시작한 취미활동의 사기를 꺾을 것인가? 아니면 비디오 게임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큰 다행으로 여기며 이 먼지구덩이 차고를 감내할 것인가!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공부 안 하던 아들이 공부한다고 책을 폈는데 그때 하필 잔소리를 해서 아들이 앞으로 다시는 책 펼 일이 없게 만들어 버리지는 않을까 불안한 그런 엄마 심정이었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뭘 만들고 싶어서 게임을 박차고 나간 건가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문 손잡이……(?) 같은 걸 만들었더군요.

문 손잡이(?)……를 만든 건가? ©스마일 엘리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에게는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평생 공부 안 하던 아들이 처음으로 1시간 공부했는데 무슨 공부하냐고 물어보면 왠지 부담스러워 앞으로 두 번 다시 공부 안 한다 할까봐요. 그리고 다음날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차고로 가더니 한 시간 넘게 지잉~지잉~ 하며 작업을 하고 들어 왔습니다. 남편이 샤워하러 간 사이 또 몰래 차고에 가봤는데, 여전히 하얗게 먼지로 뒤덮인 세상이더라고요. 그리고 이번엔 나무 손잡이 외에 다른 뭔가가 더 추가되긴 했는데 도통 뭔지 감을 잡을 수 없더라고요.

나무 손잡이와 친구들 ©스마일 엘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놀라운 건, 그저 네모난 각목이었던 나무들을 한 시간 넘게 갈아서 이런 모양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좀 신기하더라고요. 물론, 그 덕분에 사방에 엄청난 양의 나무 먼지가 쌓이긴 했지만요.

발렌타인 데이 선물?
그리고 주말이 되어 지인의 식사 초대를 받아 아이들과 다녀왔어요. 몇 시간 후에 집에 돌아와 차고를 지나가며 흘깃 보니, 오호~ 이제 뭔가 제법 형상을 갖추었더라고요. 그리고 이때 느낌이 딱! 왔습니다. 남편이 만들고 있는 게 꽃이라는 사실이요.

이것은 꽃……(?!?!) ©스마일 엘리 (?!?!)

그리고 2월이니까 왠지 발렌타인 데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것 같은 느낌?
몇 년 전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남편을 보며 임신한 저에게 서프라이즈 해주는 줄 알고 혼자 설레발쳤던 흑역사가 떠오르네요. ㅋㅋㅋ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 대목에서 제가 무한감동을 받아야 하는 거 맞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감동이 안 됐어요.ㅋㅋㅋㅋ 아니, 왜 하필? 나무로 갈아서 만든 꽃이야? 그냥 생화를 한 다발 사다줄 것이지, 아 놔~

시들지 않는 사랑의 꽃
사실 제가 남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어요. 제가 연애할 때 남편에게 그랬거든요. 꽃은 비싸고 금방 시드니까 꽃 선물은 하지 말아 달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도 나이를 먹으니까 왜 갑자기 꽃 선물이 받고 싶냐고요!!!! 그래서 나도 이제는 꽃 선물을 좀 받아보고 싶다고 몇 번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고심 끝에 시들지 않는 꽃을 선물해주려고 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이건 너무 허접한 결과물이 나올 게 뻔한데, 이걸 제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하며 몇 시간씩 나무 먼지를 마시며 작업하고 있는 남편에게 진실과 진심을 알려줄 수 도 없고, 서프라이즈인데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어서 참으로 안타까웠죠.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남편이 자기가 보낸 문자에 제가 답을 안 했다는 이유로 삐져서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어요. 유치하지만 저희 부부는 싸우면 2~3일 동안 서로 말을 안 해요. 그리고 3일 정도 지나면 딱히 화해라고 할 것도 없이 다시 말하기 시작, 왜 싸웠는지는 이미 기억 저편으로~
그런데 묵언 수행 중에도 남편은 날마다 차고에 가서 지잉~지잉~ 꽃잎을 갈아대고 있더라는…….

시들지 않는 사랑의 꽃 ©스마일 엘리

발렌타인 데이
그러나 꽃이 완성되기도 전에 발렌타인 데이가 와 버렸습니다. 미완성인 꽃을 저에게 줄 수는 없었던지, 카드와 초콜릿만 주더라고요. ㅎㅎㅎ

발렌타인 데이에 남편이 준 카드와 초콜릿 선물 ©스마일 엘리

그러나 저는 끝까지 모른 척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 드디어 완성이 됐나 보죠? ㅋ
“사실은 발렌타인 데이에 주려고 이걸 만들었는데, 그때 완성을 못해서 못 줬어. 허접한 거 나도 알아. 그래도 자기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우리가 싸워서 말 안 할 때도 이거 만들었어.”
아, 눈물 나서 울 뻔………………… 해야 하는 상황인데 자꾸 피식피식 웃음만 나올 뿐이고~, 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는데 솔직히 이걸 받고 그렇게 기쁘지는 않고, 허접한 거 본인도 안다며 선수치고 들어오니 뭐라 할 말도 없고…….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으면 차라리 장미 한 송이를 사왔으면 더 기쁘고 감동적이었으련만……. ㅋㅋㅋ

그렇지만 각목을 갈아 이 정도의 형상을 갖춘 꽃을 만들어 낸 남편의 정성은 인정, 인정!!! 그래도 저의 진심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연기에 몰입해서 제 파트의 대사를 쳐냈습니다. “아니야, 전~혀 허접하지 않아!!! 세상에! 어떻게 나무로 이렇게 꽃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 너무 고마워~ 내 생각하면서 이걸 만들었다니 자기 정말 너무 감동이야!!!” 라고 말하다가 저도 모르게 진짜로 눈가에 눈물이 맺혀 버린;;;

남편의 정성이 정말 너무 고마워서 울컥한 것인지, 제 신들린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저조차 감동을 해버린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너무 예쁘다. 진짜 잘 만들었네~!!!”라는 말로 제가 끝까지 완벽한 마무리를 했다는 사실입니다.ㅎㅎㅎ

남편과는 좋을 때도 있고 웬수처럼 미운 순간도 있지만, 그동안 지지고 볶고 싸우다 보니 점점 톱니바퀴처럼 하나씩 서로에게 맞춰지는 느낌이랄까요? 다행히 저희 남편은 이번 발렌타인 데이에 생화를 선물하는 장족의 발전을 했답니다.^^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두 아이 의 엄마. 미국 생활정보, 일상,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 <엘리네 미국 유아식> 저자. smileellie777@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