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학교 가던 날
약 4년 반 전, 5살이던 딸아이가 처음 등교하던 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처음 만나는 미국 선생님의 손을 잡고 아무것도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아빠 엄마에게 ‘난 괜찮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얼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이 녀석이 수업 중에 무서워 울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미안하고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나와 아내의 한숨까지. 다행히,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딸아이의 첫 등교일이 나의 첫 출근일이기도 해서 아이를 등교시키자마자 곧 내 걱정이 시작되었지만, 우리 아이처럼 본인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에 이끌려 온 이민 1.5세대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처럼 어린 친구들에게 물어보자니 자기의 깊은 속마음을 표현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을 듯했고, 또 중고생들 중에는 미국에 온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 그 당시의 감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차에 미국 생활이 2년 정도 되는 오늘의 주인공, 11학년 최효정 양을 만나게 되었다.
저녁에 있는 삶
먼저 가족 이민을 결정하고 진행했던 효정양의 아버지 최기섭씨에게 이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저는 한국에서 시뮬레이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지만, 시간적으로는 너무나 바쁜 생활을 해야 했죠. 그리고 전근대적인 군대식 조직문화가 너무 힘들었어요. 예를 들자면, 무리한 회식과 직급에 따른 상하관계, 관리자들에게 분배되는 과도한 업무량 같은 것들이죠.
그래서 저희 회사와 관련 있는 회사에 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문의했더니, 마침 그쪽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웨이버 기간과 H1B 비자가 추첨식이라 자리를 옮기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비숙련직 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오게 됐고, 계약기간 만료 후에 제가 전공한 일자리를 찾아 이곳 그린빌로 오게 됐죠.
가족들에게는 제가 설득을 했는데, 우선 한국에서처럼 살지 않고 온 가족이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고, 아이들도 학원교육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설득해서 진행했습니다.”
이번엔 효정양에게 부모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물어보았다.
“저는 솔직히 기뻤어요.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희망적이었어요. 물론 영어라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주위에 유학 경험이 있는 친구들 이야기도 들어보고 하면서 한번 부딪혀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효정양의 바람대로 미국 고등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의 느낌은 어땠을까?
미국 고등학교 등교 첫 날
“물론 두려웠죠.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저는 모든 준비를 다 마쳤는데 개학날까지 입학허가가 안 나왔어요. 그리고 개학 첫날 카운셀러 만나서 수업 신청하고 이것저것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두려움을 떠나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태였어요.
아, 그리고 제가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며 나름 영어 실력을 쌓고 와서 약간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부딪혀보니 아니더라고요. 단어 몇 개 빼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첫날은 그냥 모든 게 막막한 느낌이었어요. 영어가 들리기까지는 한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미국 학교에서의 차별
역시 최고의 해결책은 ‘시간’이라는 생각과 함께 또 하나의 질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비숙련직 취업 이민은 대부분 대도시가 아닌 지역으로 오기 때문에 같은 학년에 한국인은커녕 아시아인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 차별이나 놀림, 왕따 같은 일을 겪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제가 윌밍턴에서 다니던 학교도 시골이다보니 아시안 학생도 거의 없는 학교였어요. 처음엔 새로운 학생이라고 환영해주었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낯선 환경,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그룹활동 시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슬슬 무시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체육시간에 여학생들만 따로 수업을 받는데,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저한테 스시냄새, 누들냄새가 난다고 한마디씩 하고, 락커룸에서는 툭툭 치고 지나가는 일이 허다했어요.
영어수업 시간에는 저를 보고 눈을 쭈욱 찢는 행동을 한 남자아이와 정말로 심하게 싸운 적도 있었어요. 선생님의 중재로 치고받는 일은 없었지만 선생님도 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행동이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아셨대요. 그리고 그 아이를 엄청 혼내셨어요.
아빠가 한국에서 하시던 일과 관련된 직장을 찾아서 이곳 그린빌로 이사온 후로 지금 다니는 학교는 정말 좋아요. 시설도 좋고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고요. 지금은 정말 맘에 들어요.”
아마도 그 사이 효정양의 영어 실력이 늘어서 새로운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가 처음보다 훨씬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효정양의 꿈
11학년, 이제 대학을 준비해야 할 시기인데, 앞으로 어떤 진로를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요즘 주말에 응급구조사 인턴쉽을 하고 있어요. 주로 수업을 받고 가끔 앰뷸런스에 동승할 기회도 있어요. 대학은 일단 의대에 가고 싶어요. 졸업 후에 심혈관계통의 의사가 되는 게 꿈이고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일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효정양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미국에 온 효정양의 가족들이 행복한 시간을 충분히 즐기기를 같은 동네 사는 사진관 아저씨도 기도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