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비즈니스 [미국생활기] 곳곳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다

[미국생활기] 곳곳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다

0
[미국생활기] 곳곳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다
바닥에 표시된 파운데이션의 색상 번호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제품을 뒤집어서 정리했다. ©스마일 엘리

나의 일하는 원칙
제가 저희 매니저의 냉정한 태도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던 차에, 몇 주 동안 매니저를 보지 못한 기간이 있었어요. 저는 단지 서로 근무 스케줄이 달라서 못 보는 줄 알았지, 매니저가 다른 매장에 가서 일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저 매니저와 부딪치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어서 내심 좋았죠. 매니저가 정말 나를 싫어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함께 일하기 껄끄러운 느낌이었거든요.
그렇다고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어요. 누구에게든 흠 잡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제 일을 열심히 했지요. 제가 일할 때 항상 마음에 새기고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는 원칙 몇 가지가 있답니다.

1. 절대로 지각, 결근하지 않기
제가 세포라에 처음 인터뷰를 왔을 때 본의 아니게 지각을 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지각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도록 지각, 결근에 특히 더 신경을 썼습니다.

2. 할 일이 눈에 보이면 바로 하기
할 일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모른척 하면 나중에 그 일을 하라고 부탁을 받게 되잖아요. 저는 그러기 전에 제가 그냥 했어요. 누가 시켜서 일을 하는 것보다 제가 알아서 하는 게 더 나으니까요.

3. 남들이 싫어하는 일 내가 하기
일을 하다보면 ‘우리 모두의 일’ 임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은 일이 있잖아요? 번거로운 일, 힘든 일, 그래서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일. 세포라에서는 화장품 매대 청소하기, 판매된 상품 재고 채워넣기, 종이백 리필하기 등이 그런 일이에요. 중년의 나이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면 도가니가 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 있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라 위로하며 그냥 합니다. ㅠ.ㅠ

4. 시킨 일은 시킨대로 하기
제가 입사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리드 뷰티 어드바이저인 가가양이 저에게 클로징할 때 해야 할 업무들을 알려줬어요. 워크시트에 어떤 일을 끝냈는지 체크하라고 하더라고요. 워크시트에는 클로징하면서 해야 하는 일들이 리스트로 되어 있어서 하나씩 체크를 해야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매일 그 워크시트를 펼쳐 놓고 하나씩 체크하면서 일을 했어요. 그런데 4개월이 넘도록 그렇게 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못 봤어요. 우리 매장의 직원이 총 9명인데, 그 리스트에 체크하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더라고요. 심지어 그 일을 시킨 가가양조차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걸 계속 해? 말어?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윗사람이 하라고 시켰으니 아랫것은 시킨대로 해야지 싶어서 계속했어요. 사실 저는 뭐든지 리스트를 만들고 계획적으로 하는 걸 좋아해서 이런 방식이 저랑 잘 맞아서 괜찮았고, 또 습관이 되어서 안 할 이유도 없었어요.

누가 있든 없든 일하는 동안에는 일에 집중하기
일에 익숙해지고, 혼자서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저 혼자서 클로징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두 시간 동안 저 혼자 매장을 책임지게 되었죠. 보통 8시부터 9시까지는 클로징 업무인 재고 보충, 비품 보충, 계산대 정산 등으로 바쁘지만,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좀 한가한 편이에요. 그래서 이 시간을 이용해서 청소를 하거나 평소에 일하면서 불편했던 부분들을 찾아 일하기 쉽게 정리정돈하는 등의 일을 했어요.
저의 책 <엘리네 미국집>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라벨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라벨링이 살림을 얼마나 편하게 해주고 같이 생활하는 가족들이나 직장에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잘 알거든요. 그리고 한번 라벨링을 해두면 정리정돈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아주 효율적이에요.
그래서 저 혼자 근무하는 한가한 저녁 시간에 매장 이곳저곳의 정리정돈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답니다. 먼저 화장품 매대 아래 서랍장부터 시작했어요.
매대 아래 서랍장에는 여러 가지 재고가 들어 있어요.(왼쪽 사진) 매대에 있는 제품이 판매되면 이 서랍에서 재고를 찾아 보충해줘야 하는데, 도대체가 제품 하나 찾으려면 저기 묶여 있는 제품들을 하나씩 일일이 들여다보고 막 파헤쳐야 해서 재고 보충하는 데만도 시간이 엄청 걸렸어요. 이걸 매대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해야 하는데, 혼자서 재고 보충을 하면 이 짓을 하루에 백 번은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 다들 보고도 못 본 척, 안 하려고 하는 거죠. 심지어 며칠 전 나나양과 B양이 근무한 날에는 하루 종일 아무도 재고 보충을 안 해서 다음날 150개가 넘는 재고 보충을 제가 다 해야 했어요!
그래서 작은 상자를 모아서 칸을 나누고 상자마다 라벨링을 했어요. 라벨을 보면 어느 제품이 어느 칸에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으니 필요한 제품을 바로 찾을 수 있어요.

화장품 매대 아래의 어수선한 서랍장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했다. ©스마일 엘리

이어서, 파운데이션 서랍을 정리했어요. 세포라 콜렉션의 리퀴드 파운데이션은 제품 색상이 바닥에 표시되어 있어서 재고를 찾을 때마다 일일이 뒤집어서 봐야 하고, 오만 가지 색상이 다 뒤섞여 있어서 시간이 엄청 걸렸어요. 그래서 서랍의 칸을 나눠서 색깔별로 분류하고, 바닥에 표시된 색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제품을 다 뒤집어 놓았어요. 서랍을 열자마다 모든 게 한눈에 보이니 제 속이 다 시원해졌어요. (맨 위에 있는 사진 참조)
이 작업을 해놨더니 다음날 모두 난리가 났어요. 일하기가 너무 쉬워졌다고요!!! 여러 동료들에게 사랑 고백도 들었네요. 저보고 사랑한대요.^^;; 특히 오퍼레이션 담당자인 라라양은 사랑 고백과 더불어 제가 최고라고 특급 칭찬을 해주더라고요. ㅎㅎㅎ
다음으로는 세일 제품에 붙이는 가격표 스티커에 라벨링을 했어요. 스티커는 1불부터 200불까지 있는데, 바쁘게 일하다보면 원하는 가격표를 찾아서 스티커를 떼고나서 제자리에 다시 끼워 넣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스티커들이 다 섞여 있어서 원하는 스티커를 찾으려면 저 많은 스티커를 일일이 넘겨보며 찾아야 했죠. 8불짜리 스티커 하나 찾는데 4~5분이 훌쩍 지나가 버리니 어찌나 답답하고 짜증이 나던지……. 그런데 그 주범이 바로 우리 매니저였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10불 단위로 스테플러로 찍고 라벨링을 했어요.

세일 제품에 붙이는 가격표 스티커를 10불 단위로 묶고 라벨링을 해서 찾기 쉽게 만들었다. ©스마일 엘리

이렇게 재고정리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니 재고 보충에 필요한 시간이 엄청 단축되고,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힘든 일을 피하려고 서로 눈치 싸움을 할 필요도 없으니 동료들과도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일할 수 있게 되었죠.

보이지 않는 눈과 귀
그런데 말입니다……,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몇 주 동안 제가 혼자 매장을 지키면서 이렇게 쉬지 않고 매장에서 왔다갔다하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더라고요. 세포라 매장에는 저 혼자뿐이었지만, 콜스 백화점의 다른 매장 직원들과 수퍼바이저들이 오며가며 제가 일하는 모습을 봤던 거예요. 그리고 특히 도난방지 부서(Loss and Prevention)의 담당자분은 영상실에서 카메라로 도난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분인데, 업무상 도난 사고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일하는 모습도 계속 지켜보게 되었던 거죠. 직원들이 일을 하나 안 하나 지켜보는 게 그분의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제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분이 글쎄, 몇 주 동안 매장을 비웠다가 돌아온 저희 매니저에게 제 얘기를 했다지 뭐예요? 정말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요. 매장에 아무도 없을 때도 혼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또 저희 매니저가 그동안 제가 클로징하면서 체크했던 워크시트를 콜스 백화점의 수퍼바이저에게 보여줬는데, 수퍼바이저가 너무 인상적이라고 했대요. 아무도 안 하는데 저 혼자서만 이걸 하고 있었다고. 이걸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저 혼자 하는 일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고, 아무도 안 보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저를 지켜보던 눈과 귀가 곳곳에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 거죠. 더 놀라운 것은, 저희 매니저가 매장에 출근을 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을 전해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어요. 아마도 이게 매니저가 저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새로운 기회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저를 지켜보던 눈과 귀 덕분에 저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이었어요. 어느 날 아침에 출근을 하자 매니저가 저를 부르더니 리드 뷰티 어드바이저 포지션에 저를 추천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어요. 그리고 제가 열심히 일한 만큼 이참에 시급 협상까지 제대로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끝에 나름 괜찮은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결과가 어땠냐고요? 다음 호에서 제가 사용한 방법과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미국 생활 정보, 일상생활, 문화 차이 등을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이자 <엘리네 미국 유아식>, <엘리네 미국집> 책의 저자. [email protected]

『엘리네 미국집』에는 인테리어 초보자를 위한 다양한 미국집 인테리어 법칙과 아이디어,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시스템 살림법, 알뜰 쇼핑 정보 등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세종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