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사랑하던 아내 안느의 의식이 희미해진 순간 ©Mysterywallpaper
박성윤
미주 우리 사는 세상에서
‘박성윤의 영화는 내 인생’ 코너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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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Amour, 2012)
감독: 미카엘 하네케
주연: 장 루이 트랭티냥, 에마뉘엘 리바

또 하나의 질문
파리의 한 아파트에 경찰과 구급대원들이 출동한다. 경찰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집 안에는 악취가 진동한다. 코를 막으며 창문을 열고 테이프로 봉인된 침실 문을 열자, 꽃잎으로 장식되어 있는 침대에 검은 옷을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노파의 시신이 놓여 있다.
<하얀 리본(2002)> 이후 두 번째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함께 제85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까지 수상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의 첫 장면이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감독’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그동안 인간의 본성과 내면 세계를 잔혹하리 만큼 냉철하게 탐구해온 하네케 감독은 ‘사랑(Amour, 아무르)’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영화에서도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실존과 사랑을 해체시켜 관객들 앞에 낱낱이 보여주며 또 하나의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름답고 긴 인생
80대의 은퇴한 음악가 부부 조르주와 안느는 파리의 중산층 아파트에서 안정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단정한 맵시와 고상한 취향, 그리고 애교 있는 위트를 갖춘 아내 안느와 남편 조르주는 이제 서로의 불완전함을 평화롭게 협주하는 경지에 이른 금슬 좋은 노부부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조르주는 안느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발견한다. “왜 그래?” 하며 아내를 불러보지만 안느의 눈은 텅 비어 있다.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지만 안느는 결국 반신불수 상태로 퇴원하고, 그 후 2차 뇌졸중으로 언어장애와 치매 증상까지 얻게 된다. 자존심이 강했던 안느는 조르주에게 다시는 자신을 병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평소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조르주는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그 후 조르주는 안느가 이동할 때마다 그녀를 휠체어로 옮기고, 화장실에서 속옷을 올려주며, 음식을 챙겨 먹이는 등 헌신적으로 간호하지만 안느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기만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딸 에바와 제자가 찾아오지만,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며 어려움을 헤쳐나가겠다고 말하는 노부부에게 딱히 어떤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던 안느가 문득 조르주에게 옛날 앨범을 가져다 달라고 하고, 과거 사진을 보던 안느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워.”
“뭐가?”
“인생이.”
“…….”
“참 긴 것 같아.”
“…….”
“인생은 참 길어.”

노년의 사랑과 죽음
안느는 그동안 ‘자신’이라고 규정해온 모든 것이 붕괴되고 노쇠한 몸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자신이 실존적 의미에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점점 삶의 의지를 잃어간다. 나중에는 의사표현도 거의 하지 못한 채 연신 “아파, 아파…….” 라는 말만 내뱉는 안느를 조르주는 최선을 다해 간호하지만 점점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이웃들은 조르주의 깊은 사랑과 헌신에 감동했다며 그를 칭찬하지만, 조르주는 건강하던 시절 아름답게 피아노를 치던 아내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아내의 존엄성을 지켜줄 줄 모르는 행태에 분개하며 간병인도 쫓아버린다.
어느 날 물을 마시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안느에게 조르주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어. 죽고 싶은 거야?”라고 하자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안느는 조르주를 지그시 바라본다. 조르주는 속상한 마음에 억지로라도 물을 마시게 하지만, 그 물조차 사납게 뱉어버리자 참고 참던 조르주는 순간적으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안느의 뺨을 때리고 만다.

안느와 조르주는 평생 서로를 사랑하던 낭만적인 부부였지만, 이제 소통이 단절되고 일방적인 보살핌을 주어야 하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딸이 어머니를 병원에 보낼 것을 주장하지만, 조르주는 역정을 내며 딸이 방문했을 때 안느의 방문을 잠궈버린다. 늙고 병든 모습을 남들앞에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힘겨운 현실과 불안과 슬픔 속에 지쳐가던 조르주는 자신과 안느의 세계를 점점 고립시키며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도 창문을 모두 닫아버린다.
어느 날 면도를 하던 조르주는 “아파……, 아파…….” 하는 안느의 강박적인 울음소리를 듣고 그녀의 침대로 달려간다. 그리고 안느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그녀 옆에 누워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 조르주는 베개를 들어 안느의 얼굴을 짓눌러 질식시킨다.
안느의 죽음을 확인한 조르주는 안느의 침대를 꾸밀 꽃을 사오고 침대를 정리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아내의 뒤를 따른다. 그는 환상 속에서 건강한 아내와 함께 외출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네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메세지를 주려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조르주가 아내를 죽인 것이 아내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싶은 사랑 때문이었는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에 근거한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사유는 관객의 몫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순간 인간 실존의 경험적 산물이다. 그래서 영화 <아무르>는 노부부의 지극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 자아의 붕괴와 소멸 앞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해 가는지 관찰한다.
하네케 감독은 특히 평생 동안 지속되어온 안느와 조르주의 사랑이 노년의 질병과 죽음 앞에서 어떤 인간적 한계에 부딪힐 수 있는지 그 고통과 고뇌를 가감없이 보여주며, 우리 자신이라면 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묻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조르주와 안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 그들의 부재중에 잠시 아파트에 들른 에바가, 조르주가 앉아서 사랑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그 소파에 앉아 창문 밖을 쳐다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조르주가 고심했던 실존적 질문들은 그렇게 다음 세대로 이어져 갈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자 타임지에서는 “사랑에 관한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영화”라고 극찬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 고통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으니……” 라는 오페라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인생은 아름답고, 인생은 참 길다. 그 인생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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