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쿨에서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김소현 양 ©제롬
제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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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두어 번 지나가고 난 후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은 기온이 뚝 떨어져 자켓을 꺼내 입어야 할 정도다. 지금도 여전히 펜데믹 상황이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쌀쌀한 날씨이지만, 인터뷰에 응해준 오늘의 주인공 김소현 양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전한다.

첫 기억
아이들을 좋아하는 김소현 양은 1999년 5살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을 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곳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린빌에 이모네 가족들이 먼저 와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 부모님도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위해 이민을 선택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처음 이민 왔을 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그때 기억은 전혀 없고요, 그나마 기억나는 시절이 초등학교 2학년 정도부터예요. 킨더 가든은 일반 퍼블릭 스쿨이 아니라 ESL 스쿨을 다니다가 옮긴 걸로 기억해요. 그 시절부터 기억이 나는 이유가 아마도 그때부터 영어가 잘 들리고 말을 잘하게 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학교 생활
이민 1.5세로서 미국에서 자라고 공부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경험은 어땠을까.
“영어는 학교생활하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어요. 그 당시에 학교에 한국 학생이 저밖에 없었어요. 아시안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 친구들이 한국이 아시아의 어디에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한국에 대해 몰랐죠. 저는 성격이 약간 내성적인 면도 있는데, 학교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발하게 지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아시안 학생이 4~5명 정도 있더라고요. 학교에서 아시안이라고 차별받은 적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스쿨버스에서 다른 클래스 학생이 저의 생김새를 가지고 놀리곤 했는데 원래 그런 친구라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어딜 가나 그런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나보다. 참 얄밉지만 외지인이 안고 가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통역사
필자도 적지 않은 나이에 이민을 온 상황이라 아직도 영어가 많이 서툴다. 학교도 좀 다녀봤지만 대화는 공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항상 느끼면서 산다. 소현 양의 부모님도 비슷한 상황일 텐데, 그런 부모님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하다.
”제가 영어가 되면서부터는 거의 부모님 통역사 역할을 하게 됐죠. 그런데 대화가 좀 심각하거나 껄끄러운 상황에서는 힘들어서 울기도 했어요. 그런 성장과정 때문인지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먼저 나서게 돼요. 또 그게 저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이 희생해주신 덕분에 제가 다른 사람이 못해본 경험을 하며 살았고 지금의 제가 되었으니까요.”
우리 딸도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숙녀로 성장해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아픈 가족사
소현 양은 청소년기에 가슴 아픈 가족사를 겪기도 했다. 동생을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2011년이었어요. 처음엔 동생이 그냥 좀 아픈가 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저보다 부모님의 슬픔이 너무 크셨죠……. 그 뒤로 몇 년 후에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한국에서 살다가 아버지 일이 한국보다 미국이 더 수월하시다고 해서 먼저 돌아오셨고, 그 다음 제가, 그리고 내년에 엄마도 돌아오실 예정이에요.”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그 와중에도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귀하게 느껴진다.

마음을 따른 진로
다시 본인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학교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현재 프리스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진로에 어떤 전환점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동생이 그렇게 되고나서 저는 별다른 열정도 없이 대학교에 진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런데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저 혼자 전공을 선택하다보니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영학과를 선택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부모님이 제가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셔서 학교도 가까운 주립대로 선택했죠.
그런데 저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과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게 참 즐거웠어요.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도 아이들을 가르쳤고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프리스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코로나 상황이 아직 진정되지 않아서 많이 바쁘죠. 프리스쿨에서 일반 초등학생들을 위한 방과후 데이캐어도 같이 하거든요.
조만간 교육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해보려고 노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학교들을 알아보고 있어요. 제 안에 있는 열정을 깨닫게 해준 아이들에게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밝고 당당하게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을 테고 외로웠을 텐데 그녀의 얼굴은 밝고 환하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한국인 동생들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해본다.
“제가 어렸을 땐 한국에 대해 자랑할 게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 문화가 많이 알려졌고, 경제 규모도 커지다보니 한국을 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죠. 환경이 낯설고 다르다고 해서 움츠리지 말고 당당하게, 그리고 한국이나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그냥 자랑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대화를 마친 시간, 이른 저녁 해가 기울어 노을이 붉다. 어느 소녀의 열정처럼 예쁜 붉은 빛이다. 내 손에 남은 따뜻한 커피의 온기처럼 앞으로 소현 양의 인생이 늘 따뜻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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