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의 짧은 동행 ©blog.cheil.com

버스에서

임산부와 함께 앉게 되었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동행하게 되었네

아이와의 인연으로
내 인생이 길어지자
나는 무상으로 어려지네

버스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미안한 마음 일고
따갑게 창문 통과하는 햇살 밉다가
길가에 핀 환한 코스모스 고마워지네

아이가 나보다 선한 나를
내 맘에 낳아주네
나는 염치도 없어 순산이라네

▶ 함민복 (1962~ ) 시인, 1988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으로 『 눈물을 가르는 눈꺼풀처럼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 말랑말랑한 힘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시 해설
시인은 일상의 평범하고 소소한 경험에서 놀라운 인식과 느낌을 길어 올립니다.
버스를 탔는데 우연히 임산부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동행하게 된 것이지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옆에 앉은 아이와 동행이 되었다 생각하니 아이의 친구라도 된 듯 나는 저절로 어려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 아이와 함께 가는 동안 버스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태어나지도 않은 이 아이에게 혹여 나쁜 영향이라도 미칠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이 미워집니다. 그리고 반대로 길가에 핀 환한 코스모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시의 화자는 이렇게 아이에게 마음을 쓰다가 문득 자신이 평소의 자신보다 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을 느낍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다.
시를 읽다보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고, 우리 역시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려지고, 평소의 나보다 선한 내가 내 안에서 태어나는 느낌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탄생은 염치도 없게 순산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평소보다 내 마음을 더 순수하고 맑고 선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들과 더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 시간이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치유하고 우리를 더 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임문혁
시인, 교육학박사, (전) 진관고등학교 교장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귀.눈.입.코』 등이 있다. Ymmh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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