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나뭇가지에 매달린 빗방울들 ©Joyesa.tistory

가벼운 빗방울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 없지
가벼워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움 속내의 처절함도 훌훌 털고
저렇게 매달릴 수 있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나뭇잎에 매달리고
그래도 매달릴 곳이 없으면 허공에라도 매달리지
이 몸도 수만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에 매달렸으므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고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한 생애가 아득하지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문장이 될 수 없지
그래서 빗방울은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이지

▶ 허형만 (1945~ ) 시인. 전남 순천 출생.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청명』, 『풀잎이 하나님에게』, 『눈번 사랑』, 『불타는 얼음』, 『뒷굽』, 『바람칼』 등이 있음

시 해설
시인은 비가 갠 후에 나뭇가지나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을 봅니다. 그러면서 자문자답하고 있습니다.
‘빗방울은 어떻게 저렇게 매달릴 수 있을까? 그것은 무거움을 뿌리치고 가벼워졌기 때문일 거야. 그런데 나는 왜 저렇게 맑고 영롱하게 매달릴 수 없을까? 그것은 빗방울처럼 내 안의 무거움을 훌훌 털어내지 못하고, 처절하게 살아왔기 때문일 거야.’
온갖 욕망과 분투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던 집착의 무게. 그 무게로 인해 쉴 수 없었던 아득한 한 생애를 돌아본 것이지요. 자기성찰의 순간입니다. “수만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레 소리에”,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아프게 들여다본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숨 쉬는 것은 다 하나의 문장입니다. 가지와 잎에 가볍고 영롱하게 매달린 빗방울은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침묵의 소리이며 깨달음으로 이끄는 문장입니다.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입니다.
시인은 자기성찰을 통해, 번잡하고 무겁고 처절한 온갖 욕망을 벗어 던지고, 빗방울처럼 가볍고 투명한 사무치는 문장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낮은 곳으로 걸어 가는 성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인은 이미 가벼운 빗방울이 되어 가장 낮은 곳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임문혁
시인, 교육학박사, (전) 진관고등학교 교장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귀.눈.입.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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