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거부하는 아이
저희 첫째 아이 와플이는 너무너무 안 먹는 아이였어요. 너무 안 먹어서 주변에 하소연도 많이 했고, 온갖 방법을 찾아보며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요.
와플이가 이유식을 시작했던 때는 저희가 일본에 살고 있던 때라 한식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고, 또 첫 아이여서 잘 해 먹이고 싶은 마음과 의욕이 커서 이유식 책을 봐가며 만들어 먹였답니다. 그렇게 초기 이유식, 중기 이유식까지 잘 먹던 아이가 고형식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했어요.

한식이 주였던 와플이는 제가 실컷 만들어서 내놓으면 먹어보지도 않고, 일단 색깔을 보고 판단해서 안 먹거나, 먹을만해 보인다 싶으면 혀끝을 살짝 대보고는 맛도 보기 전에 거부했어요. 그래서 억지로라도 좀 먹이고 싶은 마음에 “한 입만 먹자. 한 입만~” 하며 따라다니며 먹이다시피 했지만, 정말 하루에 한 끼도 안 먹는 날이 허다했어요. 고픈 배는 우유로 채웠고, 여러 가지 재료를 바꿔가며 열심히 만들어 내놓은 보람도 없이 너무 안 먹으니 그 스트레스는 정말 말로 다 못할 정도였습니다.

안 먹으면 굶겨
2~3일 굶기기, 안 먹으면 바로 식판 치워버리기, 간식 안 주기 등 모든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소용 없었고, 무작정 3~4일을 굶기는 건 제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아무리 독하게 마음 먹어도 커야 할 애가 아무것도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본인이 좋다는 우유는 계속 줬고요.

와플이가 음식을 거부하면서도 그나마 먹었던 것은 미역국에 말아준 밥, 조미김, 김 자반, 멸치볶음, 우유, 사과, 바나나, 치즈, 땅콩, 빵 이 정도가 다였어요.
흔하디 흔한 딸기, 귤, 멜론, 포도, 수박도 안 먹고, 야채는 말할 것도 없이 전~혀 안 먹고, 당근은 남편과 제가 몇날 며칠 당근 먹고 힘내는 로보콩 에피소드를 같이 보면서 당근 먹으면 슈퍼 파워가 생기는 연기를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겨우 먹게 되었죠.

잘 먹어주기만 한다면야 정성 들여, 여러 가지 야채들 골고루 섞어서, 여러 가지 조리법으로 해 먹이고 싶죠. 그런데 뭘 먹어야 말이죠. 원재료에 뭐가 섞인 건 아예 먹지도 않으니까요.

애가 먹겠다는 걸 주세요
결국 소아과에 가서 상담을 했더니 소아과 의사 왈,
“우유는 양을 줄이시고, 애가 그렇게 안 먹으면 피넛 버터라도 듬뿍 먹이세요.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은 피넛 버터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고, 야채를 안 먹으면 먹는 야채만이라도 계속 먹이세요. 자기가 먹겠다고 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간에 그걸 먹이세요.”

저는 와플이가 밥을 먹는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밥 안 먹는 아이에게 피넛 버터를 듬뿍 먹이라는 의사의 조언이 와 닿지가 않았어요.
물론 그 이후에 우유의 양을 줄여서 다른 음식을 먹는 양이 조금 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자기가 늘 먹던 음식에 한해서지 새로운 음식이나 새로운 조리법의 요리를 먹는 일은 없었답니다.

미국식 유아식
그런데 분유와 젖을 먹던 둘째 아이 제제가 이유식이 끝나고 유아식으로 접어들었을 때, 첫째와 둘째를 유아용 식탁에 함께 앉혀 놓고 먹이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와플이가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제가 음식을 먹이려고 억지로 따라다니며 먹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며 제제는 미국식으로 스스로 먹게 시도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미국식으로 스스로 먹게 하자고? 한국에서 자란 제가 미국식 유아식이 어떤 게 있는지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미친듯이 구글링과 핀터레스트(pinterest) 검색을 해보니 미국식 유아식은 핑거푸드(finger food) 위주로 스스로 손으로 집어먹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메뉴도 핀터레스트를 참고해서 아이들에게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미국식 유아식이 너무 부실하고 성의 없다며 욕하면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좀 다른 메뉴가 있을까 싶어 인스타그램에 이유식으로 유명하다는 사람들을 검색해봐도 메뉴는 핀터레스트에서 검색했던 것들과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메뉴들을 참고해서 와플이와 제제에게 똑같은 음식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거나 잘 먹는 제제는 새로운 음식도 곧잘 먹어보는데 와플이는 역시나 버리는 게 반 이상이어서 제제한테는 미안했지만 우선은 와플이가 먹는 음식들을 위주로 준비했습니다. 야채는 당근 위주로, 소고기보다는 닭고기 위주로, 과일은 바나나와 사과를 위주로 먹이기 시작했지요.

식단이 너무 와플이 중심인 것 같아 제제에게 새로운 음식을 주면서 와플이에게는 아주 극소량(완두콩 한두 알, 옥수수 한두 알)을 놓아주었고, 만약 식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다 먹으면 스티커를 주고, 스티커를 많이 모으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프로모션(?)도 시작했어요.

그 결과 안 먹고 버리는 음식이 더 많았던 와플이는 동생이 먹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한 입씩 먹어보는 음식이 늘기 시작했어요. 완두콩 한 알을 먹었던 날은 먹고 바로 뱉어버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런 시도를 해줬다는 것 자체가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아이가 만약 브로콜리도 잘 먹고, 피망도 잘 먹고, 아스파라거스도 잘 먹는다면 식판에 색감도 이쁘게 골고루 올려주는 일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잘 먹기만 한다면 볶아서도 주고, 무쳐서도 주고, 스팀해서도 주고, 그런 게 뭐 대수겠습니까? 그런데 안 먹으니까요. 우리 아이는 안 먹으니까 먹을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천천히 먹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게으른 엄마?
제 블로그를 보고 “미국식으로라도 성의 있게 차려주지. 게을러서 다 잘라진 당근 포장만 뜯어서 올리고, 캔에 든 옥수수 올리면서(참고로 캔 옥수수 아닙니다.) 애들 사진 찍어줄 시간에 요리나 해라.” 하며 질책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미국식으로 성의 있게 차려주는 건 어떤 건지 묻고 싶네요.
큰 당근 사서 제가 직접 잘라서 올리거나, 옥수수 통째로 삶아서 알알이 까서 먹이면 욕을 덜 먹었을까요? 아니면 당근이나 옥수수 조리법으로 스팀이나 볶는 거 외에 제가 모르는 아주 정성스런 조리법이 있는 걸까요?

지금 와플이는 제제와 함께 유아식을 시작으로 점점 어른들이 먹는 메뉴 그대로 먹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중입니다. 미국식 핑거푸드 중심의 자기주도 유아식으로 스스로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먹도록 한 것이 와플이의 음식 거부를 나아지게 했고, 조금씩 시도해보는 음식들이 늘어났기에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지금은 포도, 망고, 블루베리, 오렌지까지 먹기 시작했고, 야채는 당근 외에 오이도 먹기 시작했죠. 예전엔 원재료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한 입 베어물기도 하고, 먹을만하다 싶으면 식판에 놓인 것을 반 이상 먹기도 합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 카스에 올렸더니 한국인 친구가 저희 아이들 식단을 보고 간식으로 보인다며 놀라기에, 같은 고민을 가진 엄마들에게 이렇게 먹여도 괜찮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제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어떤 조리법이든 아이가 맛있게 잘 먹어주고, 새로운 음식에도 잘 도전하는 아이를 키우신 엄마들 입장에서는 미국식 유아식 식단들이 성의 없고, 영양가 없고, 요리 못하는 엄마의 게으름으로 보이시겠지만, 안 먹는 아이를 키워보신 엄마들이라면 저렇게라도 시작해서 점점 잘 먹어주기만 한다면……, 저거라도 좀 먹어준다면…… 하는 마음이실 거예요.

이제 유아식을 시작하고 음식에 대한 거부 반응을 조금씩 극복하고 있는 아이에게 새로운 재료를 막 섞어서 조리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하나씩 조심스럽게 음식을 소개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점점 발전해서 저도 좀 더 많은 야채들을 추가하고, 더 다양한 조리법으로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안 먹는 아이를 둔 엄마들이 너무 부실하게 먹이고 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스마일 엘리(Smile Ellie)
국제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 워싱턴주 모제스 레이크(Moses Lake)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미국 생활정보, 일상,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smile ellie의 일상 시트콤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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